박완서 <이별의 김포공항>을 통한 세기를 넘어선 대화
박완서 작가의 책은 나를 왜 이렇게 아리게 하는가.
박완서의 단편들은 20세기 말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한국의 근현대를 겪어온 이들의 삶을 보여주며 나를 이토록 경외롭게 한다. 알 것 같으면서 모르는 게 편할 것 같은 일들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을 보여주며, 박완서의 사나운 글을 통해 나는 그들은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21세기를 어떻게 보고 있고 나는 조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계속 자문할 수밖에 없다.
단편 <이별의 김포공항> 속에는 일제시대를 통과했지만 전쟁의 피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노파가 나온다. (노파라는 표현은 지양하지만 소설 속 지칭을 그대로 가져왔다.) 조국에 이렇다 할 애정 하는 마음은 물론 없거니와 가부장적 시대에 여성의 삶을 그대로 통과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고 가까운 것부터 욕을 하지 않고는 못 지나치는 현재를 산다. 박물관의 어떤 것도 그에게는 한낱 ‘싸구려’ 일뿐이다.
그런 그가 미국행을 앞두고 박물관에서 마주한 불경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것은 어떤 마음에서였는가.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자신은 죽은 몸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를 왜 이토록 눈물 나게 하는가. 그에게 좋을 것 하나 없던 조국이었지만 그가 조국을 떠나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던가. 아들들의 꿈이 도시이던 미국에 가는 것인데, 그런 그에게 미국이 두려울 것이 뭐가 있어서 동양적인 불경 앞에서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냐 말이다. 조국이 뭐라고.
“노파는 노파의 아들들이 이를 갈며 싫어했고 진저리를 치며 놓여나기를 갈망했던 이 땅의 모든 구질구질한 것까지 자기가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안다. 노파는 마치 자기 시신을 보듯 이 숨 막히는 공포로 뽑혀 나동그라진 거대한 나무와 지상으로 노출된 수만 가닥의 수근이 말라비틀어지는 참담한 모습을 환상하며 심장을 쥐어짜듯이 서럽게 운다.”
노파는 조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자신이 조국을 얼마나 사랑했던 가를 깨닫는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지나온 여성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을 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냐고.
박완서의 글에는 사랑이 있다. 시대를 향한 사랑 조국을 향한 사랑. 그 시대에 사랑의 표현은 저항이다. 그들은 사랑했기에 저항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 주인공을 모두 여성으로 다룬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 시대상 여성은 사회의 주체가 아니다. 그때의 여자들은 자칫 허황함과 무기력함 속에서 주체성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녀들은 과거를 전혀 달콤하지 않고 오히려 끔찍할 수 있었던 기억들을 회귀할 수 있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그려나간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열렬히 저항하고 욕심이 있으며 악바리 있고 누구보다 깊이 사랑할 줄 아는 여성이다.
<지렁이 울음소리>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년 부인인 주인공의 삶은 안온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그녀는 편안한 것, 행복한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는 예전 고등학교 선생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이토록 위화감을 느끼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그녀의 선생님은 이 시대의 저항하는 목소리를 냈었고, 그의 호기로움은 세상을 다 이길 수 있을 만큼의 포부였던 것이다. 그의 비분강개를 보며 학창 시절을 보내왔고, 단연한 의지로 가득 찬 그의 모습을 보며 세상의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안에서 희망과 행복을 찾는 일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듯하다. 그런 그녀가 선생님을 다시 보았을 때는 그녀의 남편처럼 자본주의 시대 속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그녀는 행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아픔과 슬픔에 기꺼이 동참할 의지가 다분해 보인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자꾸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각과 마음속 불씨가 향하는 방향이 나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다. 아직도 그것이 선명하게 뭔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녀들의 사랑 앞에서 한없이 가볍고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새소년의 ‘난춘’을 들으며 이 책을 정리하였다. “그대 나의 작은 심장에 귀 기울일 때에”, “파도보다 더 거칠게 내리치는 오 그대여 부서지지 마 바람 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 마 이리 와 나를 꼭 안자”,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이 가사들은 19세기와 20세기를 살아온 그녀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전하는 말이자,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19세기 이후를 통과한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박완서의 이야기로 나는 그녀들과 “입을 꼭 맞추어 어제에 도착”한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로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