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1주차 일기
2017년 이후 5년 만에 백수가 되었다.
김개울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데 2017년 4살이던 이 분도 올해 9살이 되었다. 어느덧 할배의 나이. 우리집에 처음 오신 그 때가 어찌나 엊그제같은지, 아직도 개울이 나이가 4살이나 5살쯤인 것만 같다. 다행히 조금(이라고 믿고 싶다) 뱃살이 늘고 조금 운동력이 떨어진 것 말고는, 모두 건강해 보인다. 김개울 할아버지 제가 잘 할게요.
짝꿍이 회사 동료와 밥을 먹는 데 나를 초대했다. 30분 정도 걸어서 식사 장소에 도착. 맨 처음 보인 건 퇴근한 그의 손에 들린 버물리. 모기 물려서 다리가 간지럽다는 내 말을 기억한 거다. 나 이런 사소한 거에 되게 감동받잖아…
어쩌면 사소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기억하고, 실행에 옮기는 거. 은근히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꾸준히 하기도 어렵다. 근데 이걸 꾸준히 해야 잘 할 수 있고, 또 누군가와 친밀해질 수도 있다. 나는 가끔 그걸 ‘친구력’이라고 부른다. (내 마음속으로 혼자 그렇게 부른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할지, 그래서 무슨 선물이 좋을지’를 잠깐씩 생각해보는데 가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희박하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마저, 내가 그 즈음 관심있는 물건이나 음식인 경우가 많다.) 최근엔 재민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도저히 생일 선물을 못 고르겠어서 그냥 꽃을 사갔는데, 버스 타고 가는 길 내내 ‘이 선물을 부담스러워하면 (혹은 크리피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다.
꽃 받고 첫 마디를 “이거 나 주는 거야?” 했던 재민언니는 집에 가서 이런 사진을 보내주었다. ‘생각해보니 너에게 받은 게 많은 것 같다’면서.
내가 가진 친구력은 수많은 뛰어난 친구력의 소유자들이 나의 무관심과 무신경에 치여가면서도 꾸준힌 관심과 애정을 주어 디벨롭 시킨 결과물이다.
백수가 되니까 갑자기 미니멀리즘 하고 싶어진다. 집에서 유통기한 지난 물건들, 안 쓰는 물건들, 취향과 맞지 않는 (혹은 그렇게 된) 물건들을 없애고 있다. “오늘의 비움”이라면서 집에서 없애는 물건들을 찍어서 올리는 계정이 있다. 량쯔라는 분인데 안 쓰게 된 물건들을 처분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적어두시는 게 꽤 유용했다.
이 분이 올리시는 세탁기 건조기 청소법 보고 삘 받아서 세탁기 필터 청소도 했다.
베란다의 장바구니도 정리했다. 잠시 펼쳐둔 장바구니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위에 정착하신 김개울 할아버지 (9세, 무직).
인테리어의 완성은 고양이. 스스로 오브제가 되신 김개울 할아버지 (9세, 귀여운 거 말고 하는 일 없음)
한솔이 만나러 가는 길. 중랑천 응봉교
서울숲에서 만난 개울정원.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 개울은 원래 이런 뜻이었지. 개울을 다른 뜻으로도 쓰게 된 지 어느새 6년이 흘렀다.
성수 카페 퀸테트. 평소 궁금했던 식물을 마주침. ‘아비스 고사리’라고 한솔이가 알려주었다. 속초 문우당서림에서도 이 식물이 구석구석 장식되어 있었지. 어찌나 예쁘게 배치해두었던지 서점 가서 식물들만 구경하다 왔었다.
오랜만에 만난 한솔이는 (건강상의 이슈가 있는 걸 제외하면) 고시생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계속 캠을 켜두고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12시간을 앉아서 공부하면 당연히 건강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겠지. 나는 절대 못할 것 같다… 그런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친구야, 난 네가 참 대단하다.
지하철에서 읽으려고 예찬에게 선물받은 김혼비 책 <다정소감>을 들고 나갔는데, 한솔이한테 또 김혼비 책을 선물 받았다. 이번에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한솔이도 알고 보니 풋살을 했었다고. 주변에 축구하는 여성 친구들 벌써 셋이네.
잘 먹고 잘 지냈던 백수 1주차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