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2

(feat.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 9일차)

by LEON

드디어 M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만쉐이~ 만쉐이~ 만쉐이~


그 멍하고, 무기력한 현실감각 제로의 표정과

때로 무지성과 비논리로 야만스런 말과 행동을 뿜어내는

금쪽같은 내 쉐끼에 시달리는 시간이 확 줄었으니

만세삼창을 아니할 수 없다.


어제는 방학의 마지막날 이벤트처럼

또 수학학원에 가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 학원을 모두 정리하고

그나마 딱 하나 남겨둔 수학학원을 주기적 이벤트로 안 가주시고,

올 여름방학부터 다니기 시작한 논술학원은

지난 토요일 수업 중

글이 읽히지 않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수업 중간에 돌아와버렸다.


빈번하게 반복되는 일인데도 M이 학원에 오지 않을 때마다

꼬박꼬박 내게 연락해서 M의 부재와 안부를 챙겨주시는 감사한 수학학원 원장님!

"어머니! M이 수업 중 자꾸 그림을 그려요.

설명하면 빠르게 이해하는데 멍-하니 있을 때가 더 많아요. "

"원장님! 너무 답답하시죠? 정말 면목없고 죄송해요.

그런데 올 여름에 많이 좋아져서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좋아---졌나요?" (당황하시는 원장님 ㅋㅋ)

"네. 많이 좋아졌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이런 방향은 전혀 아니지만

M의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졌어요.

다 원장님 덕분이에요.

그러니까 그림 그리고, 멍 때리더라도 자꾸 학원으로 불러주시고,

그냥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장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M의 방에 가보니

아니나다를까 또 다시 어둠의 동굴 속에 들어가서

시커먼 낯빛과 총기라곤 없는 허망한 눈빛으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전같으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 맘을 다스리지 못 하고

몇 마디 쏘아붙였거나

하다못해 눈빛 레이저라도 발사해 줬을 텐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고교생활 내내 겪어온 베테랑 엄마답게

M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가벼운 스몰토크부터 시작해서

미세한 반응이 감지되는 순간

M의 도파민 원천인 덕질 떡밥 수다를 마구 투척했다.

아니나다를까 M의 얼굴에 금방 표정이 생겨나고,

화색이 확- 돌더니

"저녁 먹자."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식탁에 앉히기까지 성공!!!

(M이 덕질 안 했으면 어쩔뻔, 유튜버 0000님께 감사!)


무사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차피 공부 안 할 거, 방학 마지막 날이고 하니 함께 영화나 보자고 제안했다.

선정된 영화는 '기쿠지로의 여름'

(M은 모든 캐릭터를 다 죽여버리는 잔인한 폭력물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 내가 NO!!!)

기쿠지로의 여름 포스터.PNG [기쿠지로의 여름, 1999] 기타노 다케시 각본/감독

히사이시조의 OST 'Summer'를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난 그동안 '기쿠지로의 여름'이 애니메이션인줄 알고 있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인줄은 전혀 몰랐다.

영화는 애잔했지만 따듯했고,

엉뚱했지만 꿈꾸는 듯 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을 테지만

나에게는 영화의 잔잔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서사가 위로와 치유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모성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돌아보게 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떠올랐고,

故 김새론 배우가 나왔던 '아저씨'도 살짝 겹쳐 보였다.

M이 원했던 폭력물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너무 좋았다며 날 꼭 껴안아 주었다.

(그래, 너에게는 이런 말랑한 감성이 아직 살아있다구 ^0^)


영화를 보게 된 과정과 상황 때문인지

우리가 처한 현실과 영화의 서사가 자꾸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마사오처럼 M에게 이 여름이 잔인할지라도 성장의 한 페이지가 되길 바라고,

문제 투성이인 어른일지라도 끝까지 곁을 지켜주는 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을

기쿠지로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끼며

엄마로서 부족한 나를 조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여름방학의 마지막 밤

자칫 M의 학원 땡땡이로 깊은 시름 가득한 밤이 될 뻔 하였으나

'기쿠지로의 여름'과 함께

M과 나의 여름도 포근하게 마무리되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였다.

이 기적이 가능했던 건

M의 말과 행동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할 수 있었던 나의 담대했던 마음 덕분!

그럼 평소와 달리 담대한 마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오늘로써 9일차에 접어든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 덕분이 아닐까?


솔직히 100일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는

툭하면 미사 중 잠 마귀에 씌인 것처럼 꾸벅꾸벅 졸기나 하는 날나리 신자인 내가

100일 동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기도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내가 애쓰고 기도하는데 M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아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으나

막상 기도를 시작하고 보니

M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나의 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수많은 성인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어대며

M을 포함한 모든 수험생을 위하여 빌어달라는 기도를 드리다보면

이토록 많은 성인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터이니

언젠가는 M이 우주의 모든 긍정적 기운에 힘 입어

잘 살아가게 될 거란 막연한 희망이 생기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저희 아이들을 주님께 봉헌합니다.'하고 기도를 드리다보면

주님께서 알아서 잘 이끌어 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자라나

나를 자극하는 M의 말과 행동에 차츰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어가는 듯 하다.

(가부좌로 인한 다리 저림만 좀 해결되면 좋을 텐데 ^^;;;)

더불어 오늘은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만 오천년 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기적이 아닌가!!! (+o+)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는

실은 '수험생의 부모를 위한 100일 기도'이고,

기도를 통한 부모의 변화로 인해 결국 수험생도 변화하게 되는 100일 기도가 아닐까?

길고 길었던 M의 여름방학은 어제로 끝났지만

우리의 변화는 계속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