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another & the other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 대한 오마주

by LEON

제13회 공유저작물 창작공모전에 응모했던 글입니다.

구글 폼으로 제출했고, 뒤늦게 브런치 작가 승인이 되어 이 곳에도 올립니다.



#1 결심


정말로 후회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제 결심은 변함 없습니다.


세 달 전만해도 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될 줄 난 정말 알지 못했다. ‘인생이란 예측불허’라지만

내 삶은 분명하게 예측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살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그 곳에 찾아갔을 뿐이었다.



#2 [3개월 전] 입소


지-이-든, 2043년 1월 29일생, 35세, 만성신부전증으로 인한 인공신장 이식 경험 3회


터치패드에 지문을 찍고, 의료 정보 공개에 동의를 하자 AI는 메마른 어조로 나의 정보를 읊었다.

센터 가이드는 모니터에 나열되어 있는 나머지 정보를 빠르게 스크롤하며 훑어보았다.

‘Human JOON’이라고 적힌 그의 가슴팍 이름표에 내 시선이 닿자

스마트 조명이 갑자기 조도를 높여 이름표가 반짝거렸다.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지만 내내 자신을 관찰했다는 걸 가이드는 아마 눈치 챘을 게다.


확인되셨습니다. 신장이식 때문에 찾아오신 거지요?

아이고- 인공신장 이식을 세 번이나 하셨으면 그동안 고생을 엄청 하셨겠네요.

이번에 또 거부반응이 나타난 건가요?


이번에는 그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며 관찰했지만 조명의 변화는 없었다.

워낙 빠르고 노련한 눈의 움직임 탓에 스마트 조명은 이름조차 무색하게 채 그의 시선을 쫓아가지 못했다.

내 상태가 절망적이라는 걸 그는 한 눈에 알아봤을 거다.

내 몸은 지금 눈사람을 방불케 할 만큼 퉁퉁 부어있는 상태이니까


진작 저희 클론 센터를 찾아주시지 그러셨어요?

고객님의 줄기세포로 복제된 클론의 신장은 인공신장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게다가 올해 초 개발된 신기술 덕분에 이식 가능한 상태로 클론을 성장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단축됐습니다. 작년까지는 최소 1년이 필요했지만 이제 6개월이면...


정말로 이곳에 오고 싶진 않았다.

클론 복제를 신청할 수 있을 만큼 중증 환자로 분류된 것은 이미 예전의 일이었지만

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나를 만들고,

나 아닌 나의 장기를 뗀 후 바로 폐기 처분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상태가 위중해서 최대한 수술을 서둘러야겠네요. 수술날짜는 2077년 6월 18일로 잡겠습니다. 자! 이제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하셔야 되니까 오늘부터 당장 센터에 입소해서 생활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관리를 잘 할 테니까 그냥 제 집에서 지내고 싶은데 안 될까요? 환경이 바뀌는 건 좀 힘들어서요.

죄송합니다. 필수 규정이라서 예외를 둘 순 없어요. 미라이씨 사건 아시죠? 그 사건 이후 클론을 신청하신 분들은 신청 시점부터 폐기까지 반드시 센터에서 거주해야 하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그 사건이라면 워낙 떠들썩했기 때문에 나도 알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이던 미라이씨가 클론을 신청한 후 안구이식을 받기로 한 바로 그날, 교통사고로 숨졌다지.

모두들 미라이씨의 어긋난 운명에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혼자서 당시 품었던 엉뚱한 의문이 떠올라 불쑥 질문을 던졌다.


미라이씨의 클론은 그 후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담당자는 비밀스럽게 나직이 속삭였다.

어떻게 됐을 거 같습니까?

오리진 인간이 없어진 클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처음 겪는 일이라서 그때 정말 난감했습니다.

오리진이 없으니까 폐기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생명윤리위원회에서는 일단 유지하기로 했어요.

법안이 공식적으로 확정될 때까지 심의기간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라 계속 혼자 둘 수도 없고,

유지하기로 결정되면 어느 정도 생활 능력이 필요하니까

적당한 일을 주고 이 안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 이름을 갖고 인간과 접촉이 허용된 유일한 클론이지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결정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폐기시켜야 한다면 뭔가 찜찜하고,

그렇다고 계속 유지하자니 복잡한데다가 비용 부담도 있고...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입니다.

그래서 예방이 중요한 거죠.

수술 전까지 저희가 철저하게 건강 관리를 해 드릴 테니까 오늘부터 바로 입소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2의 미라이가 있어선 안 되니까요.



#3 만남


생각보다 센터 생활은 지낼 만 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날 걱정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해 좋았다.

신부전증을 앓기 시작한 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난 가족을 포함한 모든 주변 사람들의 걱정스런 시선에 갇혀 살아왔다.

‘얼마나 힘드니?’‘괜찮니?’무언가 연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날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에 솔직히 지쳐있었다. 그 눈길에 부응해서 ‘저는 괜찮아요. 병마와 싸워서 이겨낼 테니 걱정마세요.’라고

위로를 해줘야 하는 아이러니에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낸 한 달 동안 내가 만난 이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다.

하기야 투석을 하고,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내내 AI 로봇에 둘러싸여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몇 안 되는 클론 센터의 인간 직원들은 부딪힐 일 조차 거의 없었다.

그리고 매일 만나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피 안마 받으시겠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두피 안마를 마치겠습니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나타나서 그녀는 녹음기처럼 딱 3개의 문장을 매일 반복했다.


클론 미라이는 인간과 접촉이 허용된 유일한 클론이지만 인간과의 감정 교류는 불가능합니다.

생명윤리위원회는 오리진이 없는 클론 미라이를 일단 유지시키되

감정 뇌에서 인간과 교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차단하라고 지시했지요.


가이드 준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인간인 나와는 아무런 감정도 나눌 수가 없을 테니

그녀가 날 어떻게 보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 어떤 감정노동도 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명랑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항상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나를 대했다.

그 무미건조함이 나는 편안했다.

그래서였을까?



#4 그날


생각보다 클론 성장 속도가 빨라서 수술 날짜를 앞당길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예상으로는 두 달 후면 이식이 가능할 것 같아요.


두 달 후면 지긋지긋한 투석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다니, 그날은 기분이 하늘을 찔렀다.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날 수다스럽게 그녀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하루하루 그녀가 익숙해지며 가끔 한두 마디씩 건네곤 했지만 그날은 마사지 내내 입을 쉬지 않았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하세요?

그럼 몇 명이나 안마를 하게 되나요?

그렇게 많이요? 아이구 힘드시겠네요. 손이 아프면 오늘은 그만 해 주셔도 됩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배려... 이 상황에서 이 몸으로 내가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다니...

어쩐지 으쓱해져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녀를 상대로 입에 발린 말을 주절주절 원 없이 지껄여댔다.

정말 시원하게 잘 하십니다.

두피 마사지 받고나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에요.

덕분에 항상 감사합니....

팟!!!


순간 암흑이 내려앉았다.

어? 무슨 일이지?

어둠 속에서 당황하며 두리번거렸지만 이내 자동 제어 시스템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고객님들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전력 공급의 일시적 오류로 정전이 되었으나 3분 이내 복구 가능하오니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정전된 거였네요. 참, 웃기죠.

달나라로 여행을 가고, 날씨를 조절하고, 뭐든지 다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도

여전히 전기가 없으면 그냥 암흑이 된다는 게 허허허-

어둠 속에서 내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질 때

내 머리카락 속에서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고 있다는 걸 느꼈다.


괜찮으세요?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미라이씨! 괜찮으세요?

아- 아- 아-

그녀는 양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비명을 질러대며 바들바들 떨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머리를 흔들었다 벽을 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으로 느껴졌다.

어떡해야 할지 몰라서 머리가 하얘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를 덥석 안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품 안에서 여전히 그녀는 떨고 있었다.

나는 그저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만 반복했다.

스무 번쯤 말했을까?

떨림이 잦아들고, 그녀의 몸이 고요해졌을 때 다시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그때,,, 나는 보았다.

어느새 기능이 복구된 스마트 조명이 내 시선을 따라 조도를 높였고,

그녀의 눈물이 반짝 빛났다.



#5 변화


인간과의 감정 교류가 차단되었을 뿐 감정을 아예 못 느끼는 건 아닙니다.

아마 과거 기억때문 아니었을까요?

미라이씨는 사고로 후천적 시각장애인이 됐고, 그 후 안마사로 일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리진 미라이씨의 뇌에 기록된 강렬한 기억들이 클론의 무의식에도 남아있을 수 있어요.


정전으로 인한 갑작스런 어둠이 무의식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걸까?

그날 이후 나는 그녀가 어쩐지 불편해졌다.

그녀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를 자꾸만 의식하게 되었다.

머리를 그녀에게 맡긴 채 더 이상 맘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해.’라고 스스로 되뇌였지만

그녀의 예민한 손길이 내 두피를 자극할 때면

어쩐지 바보같은 내 머릿속 생각들을 몽땅 그녀가 읽고 있는 것 같아 민망함을 참기 힘들었다.


오늘은 그만 하셔도 됩니다.

불편하셨습니까? 불편한 점을 말해주시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요.


‘삐리릭-’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 기분이 나빴을 리가 없잖아. 아무 것도 못 느끼는데,

정말 아무 것도 못 느낄까? 못 느끼겠지. 차단됐는데’

잡스러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우두커니 앉은 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건강을 위해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오케이’하고 말해주시면 불을 끄겠습니다.


스마트 조명의 안내 멘트에 조그맣게 ‘오케이’라고 답하자 이내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그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재생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손가락, 그녀의 몸부림, 그녀의 괴성,

하지만 내 품 안에서 고요해지던 그녀,

그리고 그녀의 눈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백 번, 천 번 끝없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다가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6 바람


이번 주에도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줄었습니다.

식사를 아예 안 하시는 겁니까?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심리치료는 왜 거부하십니까?

이런 상태면 정말 곤란합니다. 수술을 버텨낼 체력이 안 돼요.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을 것 같지 않던 가이드 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화무쌍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내 태도에 그는 더욱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기를 좀 해 보세요. 수술 날짜는 다가오고, 클론은 성장 마무리 단계고,

모든 게 다 착착 진행되고 있는데 정작 고객님 상태가 최악이잖아요.

이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고객님 건강 관리가 제 일인데... 저도 정말 피가 마릅니다.

미라이씨는 왜 요즘 보이지 않죠?

네? 누구요?

미라이씨요. 두피 안마 해주시는...

아- 클론 미라이요. 근무지 재배정으로 다른 구역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미라이는 왜?


순간 가이드 준은 멈칫 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미라이씨는 이제 제가 있는 곳으로는 안 오는 건가요?


이제 준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근무지를 다시 바꿀 수는 없나요?

설마 미라이 때문에... 하! 말도 안돼.

지이든 고객님!!! 정신 차리세요.

상대는 클론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클론이라고요.

언제 폐기될지 모르는 클론, 지이든 고객님께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클론이요.

정말로 아무 것도 못 느끼나요?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차단돼서 못 느끼는 거라면 그걸 풀면 되잖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생명윤리법을 위반이라도 하시게요?

법을 위반하면 차단된 걸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방법이 있다는 거군요.

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이윽고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방법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누가 그걸 하려고 들까요?

그런 일을 저지르는 순간 종신형으로 전자감옥에서 썩게 될 텐데요.


나도 알고 있었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하루 종일 온통 그녀에 대한 생각이 꽉 차 있어서

제대로 먹을 수도, 제대로 잘 수도,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고개를 떨군 채 미동도 않는 나를 준은 슬며시 구슬리기 시작했다.


일단 살고 봐야죠. 수술 받고 이곳에서 나가면 생각도 안 날 겁니다.

일시적인 거예요. 지나가는 바람같은 거죠.

수술 받고 나가면 다시는 못 보는 거죠?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하아- 진짜 왜 그러십니까?

당신은 인간이고, 걔는 인간한테는 아무 것도 못 느낀다니까요.

몇 번을 말씀드려야...


준의 고함소리가 딴 세상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지루해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저만치 정원에서 센터의 강아지와 놀고 있는 낯익은 실루엣의 누군가가 보였다.

미라이 그녀였다.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 앞으로 달려갔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미라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제가 인간이라서 저에게 아무 것도 못 느끼는 거라면...

그럼 제가 인간이 아니라면 느낄 수도 있다는 거네요.



#7 결심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이에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나의 단호함에 닥터 케이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가이드 준의 말대로 줄곧 아웃사이더적인 행보를 보여 온 의학계의 괴짜다웠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건 항상 저를 흥분시키죠.

클론을 만들어달라는 인간은 많았지만 클론이 되고 싶다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하하하-

현행법으로는 아직 관련 법이 없어서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새로운 역사를 어떻게 써 나갈지 제 계획을 말씀드리죠.

인간과 클론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재 유일한 차이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 온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과 관련된 다양한 감정들이죠.

따라서 당신 머릿 속에 저장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들을 모두 소멸시키면....

모든 게 다 지워지나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른 인간과 관련된 뇌의 정보들이니까 대부분의 기억이나 감정이 지워지겠죠.

인간과 관련된 기억이 아니라면 남아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공간에 대한 정보 같은 것들은 그대로 남게 될 겁니다.


그녀와의 기억이 남아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뇌 시술은 제거해야 하는 시냅스의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검사부터 시술까지 아마 보름 정도,

그리고 시술이 끝나고 시냅스가 다시 안정화되는 데 또 보름 정도가 걸릴 겁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시간을 더 단축시킬 순 없나요?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죠.

그럼 하루라도 빨리 해 주세요.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정말로 후회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제 결심은 변함 없습니다.



#8 탄생


오늘은 출생부터 시작해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순차적으로 제거할 겁니다.

시술이 끝나고 두통이나 메스꺼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작해도 될까요?

시작해주세요.


수많은 기계에 둘러싸인 채 첫 시술이 시작됐다.

처음 발병했던 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늘상 의료기기를 접하고 살아왔지만

이토록 많은 기계 속에 자리한 건 처음이라서 더욱 긴장됐다.


10초 후 수면 상태에 돌입합니다. 10, 9, 8, 7...


나의 출생은 어떠했을까?

아무 생각도 나질 않으니 없어져도 무방한 기억이겠지.

나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던가?

날 안고 우는 어머니, 한숨 쉬는 아버지,

그리고 병원의 하얗고 차가운 투석실, 발버둥치며 고통스러워 하던 나...

분명 내가 보고 느꼈을 기억인데도

마치 관객이 되어 영화를 보듯 제 3자의 입장에서 나의 어린 시절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신기했다.

아무튼 좋은 기억은 별로 없는 모양이군.

‘좋은 기억’하니까 그녀가 떠올랐다.

내 품 안에서 고요해지던 그녀...

태어나서 처음으로 힘든 상황의 누군가에게 내가 힘이 돼주었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9 회복


삐빅 삐빅 삐빅-


AI폰의 알림 벨소리에 눈을 떴다. 극심한 두통이 머리를 찔렀다.


무슨 일이야?

영상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하고 말해주시면 영상메시지를 재현하겠습니다.


발신자는 ‘가이드 준’이었다.

‘누구지? 가이드라니? 여행이라도 다녀왔었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집어 들었다.

나는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기억 제거 시술 전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 미리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노트의 제목 란에‘Memory’라고 내 자필로 씌여 있었다.

2077년에 손글씨 공책이라니...

기록의 양은 많지 않았기에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클론 센터 담당 직원

나의 현재 상태에 대해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그렇다면 중요한 메시지가 분명했다.

확인!

이윽고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가이드 준이란 사람은 매우 격앙된 어조였다.


지이든씨! 언제 돌아오십니까? 지금 하루가 급합니다.

클론은 벌써 일주일 전에 성장이 완료됐어요.

지금 별도로 개별실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순 없습니다.

지이든씨가 센터를 떠나 있는 것도 건강상의 특별 사유로 허용되고 있긴 하지만

너무 길어지면 생명윤리위에서 조사를 나올 수도 있고요.

제발 빨리 돌아오십시오. 메시지 확인하시면 꼭 연락 주시고요.


‘클론센터로 돌아오라’로 요약될 수 있는 메시지였지만

난 지금 돌아갈 수 없으니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 수 없었다.

‘제발’이란 단어를 쓴 걸로 봐서는 돌아오기를 강하게 원하는 걸로 보이나 어쩌겠는가?

회복되려면 나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기억 제거 시술은 성공적입니다.

그리고 인간과의 감정 교류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과 관련해서는

마음의 동요 없이 논리에 따라 사고를 하게 될 겁니다.


닥터 케이란 사람의 말은 옳았다. 시술은 잘 된 것 같다.

‘클론 센터로 돌아오라’ 나야말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순간 설레임에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 것 같았다.

‘그녀와 나누게 될 첫 번째 감정, 첫 번째 느낌은 무엇일까?’

저절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화끈거렸다.

송곳으로 뇌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도 날아오르는 내 기분을 누르진 못했다.



#10 재회


불투명 유리를 통해 자동 샴푸 침대에 누워있는 누군가와

그의 머리 언저리에 서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이내 나지막이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피 안마를 마치겠습니다.


이제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올 것이다.

‘그녀와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날 보면 반가워할까? 설마 날 기억조차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문 밖에 서 있는 날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날 지나쳐 또각 또각 걸어서 저만치 멀어져 갔다.

이대로 그녀를 놓칠 순 없었다.


저 미라이씨! 맞죠? 저 기억하시나요?

안녕하세요. B구역 고객님 아니신가요?

맞아요. 기억하시는군요. 오늘 일은 다 마치셨나요? 시간 괜찮으시면 잠시만...

공식적인 업무는 끝났습니다만 추가 업무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형식적인 목례를 하고 그녀는 잰 걸음으로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했던 첫 만남인데...

허탈한 맘에 힘이 쭉 빠졌지만 아직은 주저앉을 수 없었다.

서둘러 D구역 건물을 빠져나와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마침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의 산책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강아지가 달려와 그녀의 다리를 핥자 두어 번 쓰다듬은 뒤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 걸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가긴 했지만

그녀는 뒤쫓아가는 나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바빠 보였다.

산책로를 지나 돌다리를 건너

그녀는 자그마한 건물 앞에 잠시 멈춰 섰다가 곧 안으로 사라졌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건물을 안내하는 어떤 표식도 찾을 수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입구의 출입감지 센서가 금방 알아챘다.


본 건물은 인간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출입을 원하시면 얼굴 전면을 감지 카메라 앞에 비춰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가능할까?

‘혹시’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출입 가능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삐리릭-


건물 안은 어두컴컴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움직여 보았지만 스마트 조명이 설치되지 않았는지 계속 어두운 상태였다.

AI 폰의 조명을 켜고 이리저리 비춰보니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고,

복도 끝 오른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빛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조곤조곤 이야길 나누는 소리가 또렷해졌다.

‘미라이씨의 거처인가? 누구랑 함께 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은 창 너머로 안을 엿보았다.

미라이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무릎 위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깔깔대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간혹 폭소를 터트리다가

그녀와 뒷모습의 누군가는 이따금 가볍게 입맞춤을 나누곤 했다.

나는 다리가 얼어붙은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굴까? 대체 누굴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인데’

이윽고 회전의자가 빙글 돌더니

낯익은 남자의 얼굴이 내 앞에 드러났다.






그는 바로 나였다.



#11 번민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지이든 고객님의 클론은 성장이 끝났고,

최상의 장기 상태를 유지하려면 냉동을 시킬 수도 없었어요.

당장 수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클론을 돌봐야했는데

인간과 클론의 접촉은 법규 위반이기 때문에

그 일을 클론 미라이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고요.


바늘을 주렁주렁 꼽고 긴급투석실의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에게 가이드 준은 상황을 설명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군.’이라고 납득하면서도

숨이 멎을 것처럼 가슴이 조여왔다.


괜찮으세요? 지이든씨! 더 시간 끌 거 없습니다.

얼른 수술을 받으면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돼요.

수술이 끝나면 클론은 폐기되고, 건강한 지이든씨만 남게 되겠죠.

클론 미라이가 좋아하는 건 지이든씨니까 결국 같은 겁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달라요. 미라이씨는 나에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거야 지금 지이든씨는 병이 위중해서 건강이 안 좋은 상태이고,

지이든씨 클론은 젊고 건강하잖아요.

하지만 이식을 받고 나면 예전 모습을 되찾으실 겁니다.

그럼 미라이의 지금 감정이 자연스럽게 지이든씨에게로 옮겨 가겠죠.

얼른 이식수술을 진행하는 게 최고의 해결책입니다.

의료팀에 알아봤더니 위험 부담은 있지만

24시간 투석 중인 환자도 신장이식 수술이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어요.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최대한 빨리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


가이드 준은 거칠게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의 말대로 수술을 받고 나면 정말로 그녀가 그 대신 날 좋아하게 될까?

수술이 끝나면 젊은 모습의 나는 폐기되겠지.

폐기되는 건 나인가? 내가 아닌가?

지금 그녀가 사랑하는 건 나인가? 내가 아닌가?

클론이 폐기되고 나서 그녀가 만약 날 사랑한다 해도 그건 날 사랑하는 걸까? 나 아닌 나를 사랑하는 걸까?

머리가 복잡했다.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조여 왔다.


난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다.



#12 희생


주사바늘을 주렁주렁 꼽은 채 글씨를 쓴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갓 태어난 달팽이처럼 기어가는 속도로

한 자 한 자 힘겹게 그려 넣으며 백지를 메꾸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싸인을 하는 데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모든 것은 저의 결정이니 저의 선택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삐뚤빼뚤 글씨이긴 해도 이 정도면 알아볼 순 있겠지.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책상 위에 놓고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침대 위에 누웠다.


예정대로라면 내일 이 시간에 나는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정대로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온다.


무언가 돌이켜 생각해보고 싶은데 머리는 놀라울 만큼 텅 빈 상태이다.

울어야 할 일도 안타까울 일도 슬퍼할 일도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떠오르는 것은 그녀.

욱신- 하고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나는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팔뚝의 주사바늘을 뽑으면 경고음이 울리겠지.
하지만 의료진이 도착하기 전에 나는 이미 숨이 멎어있을 것이다.
나의 건강상태는 단 한 순간도 투석기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연장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이니까.


오른손으로 왼팔의 줄들을 잡는다.

하지만 차마 뽑을 수가 없다.

무얼 망설이는 거야?


긴급 뉴스입니다.

클론 폐기에 대한 개정안이 오늘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생명윤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앞으로 오리진 인간이 없는 상태의 클론은 폐기하지 않고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AI가 나의 마지막 길에 확신을 주는구나.

그래. 이걸로 되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팔뚝에 주렁주렁 꼽혀있는 주사바늘을 단 번에 잡아 뽑았다.


삐삐삐- 긴급 상황입니다. 의료진을 호출합니다. 긴급 상황입니다. 의료진을 호출합니다. 긴급 상황...


시끄러운 AI의 경고 메시지가 배경음악처럼 리드미컬하게 느껴진다.

그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걷는

미라이와 나 아닌 나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날처럼 그녀를 안아보고 싶어 허공에 팔을 허우적대본다.

하지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와 포옹한다.

어쩐지 쓸쓸했지만

어쩐지 충분하게 느껴져 마음이 꽉 차 올랐다.


..........................................................End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이 긴 이야기를 다 봐 주신 거겠지요?

누구신지 몰라도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아주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유가 없어서 못 썼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다보니 점점 글 쓰는 게 자신 없어지고, 두려웠습니다.

마음 한 켠에 글을 쓰고픈 마음이 항상 있었지만

결국 나는 영영 못 쓰겠구나...하고 지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마음을 극복하고 다 쓰게 되어서

정말 정말 기쁘네요.

(마감일인 8월 15일 23시 59분에 겨우 마무리 지어서 제출했다는... ^^;;;;;;;;;)


글의 질과 상관없이

시작하고, 끝을 맺었다는 것에 대해

그동안의 제 자신을 용서하고, 마음의 큰 짐을 내려놓은 느낌입니다.

더구나 이런 류의 글은 처음 써 본 것이어서 스스로 많이 뿌듯합니다. 흐흐-


부디 이 글이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되어서

앞으로 꾸준히 무언가 사부작 사부작 쓸 수 있게 되길...

그런 바람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