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너는 꼭 미리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더라’라는 말을 듣곤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들과 몇 달 뒤 함께 놀러갈 계획을 세운다고 가정해보자.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가 그때도 여전히 친구일까?'이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 될 텐데, 그런 것들이 또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굳이 그런 얘기를 해야 하냐는 면박을 듣는데, 사실 할 말은 없다.
저 대사 밑에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데 이건 일종의 내 자기 방어 기제다. 미리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두면 실제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상처를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친구가 나를 싫어하게 되거나, 그와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논리다.
이건 완전히 개똥 논리다. 왜 개똥 논리냐면 내 꼴이 딱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숨 막혀 죽을까 봐 이불은 어떻게 덮고 자는가. 인간은 어리석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살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
어쨌건 그래서인지 나는 사랑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던져 본 경험이 없다. 사랑은 반드시 이별을 동반하고 이별은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은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이별, 죽음, 전염병…. 컨트롤할 수 없는 것들은 아주 쉽게 나의 평정심을 깨뜨린다. 상황을 내 계획과 예상대로 완벽하게 컨트롤하려던 내 욕심은 보기 좋게 부서진다.
그리고 이별이라는 예정된 수순을 가진 '사랑'은 언제나 내 세계와 아집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변수였다. 나를 사랑이라는 깊숙한 감정에 내맡길수록 상황은 점점 감당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다. 눈앞에 닥쳤음을 아는데도 어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끌려다니다 보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감정이 강렬할수록 위험 감지 센서는 더 시끄럽게 내게 경고한다.
‘애초에 영원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차피 없어질 것에 너무 마음 쏟지 말자’고. 지금 내 안에서 요동치는 파도도 실은 별것 아니라고 몇 번이고 되뇌다 보면, 사랑이라는 민둥산에 내몰린 나에게 작은 은신처가 생긴 기분이 든다.
나는 긴 시간을 이렇게 냉소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냉소라고 포장해서 말했지만 그냥 겁쟁이일 뿐인 걸 수도 있다. 늘 마음 한편에 도망갈 구석을 마련해 놓는 거니까. 겁쟁이는 정말로 소중한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극도로 행복한 순간에는 늘 동시에 슬퍼지고, 일상의 소소한 반짝임에도 씁쓸함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최고점에 다다른 놀이기구는 내려올 일밖에 남지 않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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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만 집중하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늘 마음속에 새기는 문장이다. 내게 생을 살면서 진정으로 원하는 능력 한 가지를 주겠노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 능력을 달라고 할 테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 쓸모없는 자기 방어 대신, 살아가는 매 순간 진정한 몰입의 경험을 하게 해 달라고. 지금 내 곁에 존재하는 것들은 오직 이 순간에만 확실하다. 그렇기에 내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충분히 느끼고, 기대하고 싶다.
어쩌면 나는 내 주변의 것들을 그 누구보다도 놓치기 싫어하면서도,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정심을 빌미로 나를 방어하는 동안 놓친 인연과 경험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나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고 싶다. 하지만 관성이란 무섭다. 주변의 무언가가 또 하나 사라질 듯한 기미를 보이면, 나는 이내 빛보다 빠르게 고치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미래를 제쳐두고 지금의 소중함을 온전히 맛보기 위한 수련은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런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건조한 미소로 사라질 것들에 이른 작별을 고한다.
*해당 글은 <잡지 비평> 2021년 3월호에 실린 '사라진, 사라질 것들에 대하여'를 수정 발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