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나에게 글쓰기란

by 공백

나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결핍에 붙들려 있었다.

그 결핍은 '완전한 이해에 대한 갈망'이었다.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결핍이지만,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명확히 규정하기까지 긴 시간을 헤매야 했다.


그리고 그 결핍이 내 감정과 판단, 관계와 선택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궁극적인 결핍' 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결핍의 실체를 알아낸 바로 그 순간, 그 결핍은 인간적 조건으로는 결코 온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다.


완전한 이해는 초월적 존재-신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 자각 이후,

막막함과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결핍의 정체를 알기 위해 들였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던 중, 우연히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이 작품 속 괴물이 가진 존재론적 결핍이, 오랫동안 내가 붙잡혀 온 결핍과 정확히 맞닿아 있음을 알아보았다.


괴물 역시 자신을 완전히 이해해 줄 단 하나의 존재를 갈망하지만, 그 충족은 인간적 조건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이는 결국 자신을 만든 창조주, 즉 빅터뿐이었다.

괴물과 나는 같은 구조 안에 있었다.


고통을 준 존재이자, 동시에 그 고통의 설명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창조주.


괴물은 나처럼 신이 아닌 다른 관계들-노인, 엘리자베스-에게 이해를 구해보지만, 그들 역시, 고통에 대한 부분적 이해만 해줄 뿐.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여줄 절대적 이해는 얻지 못한다.


결국 괴물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받는지,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지를 요구하며 창조주를 향해 돌아간다.

목적 없이 태어난 존재인 괴물과 내가 초월적 존재인 창조주를 찾게 되는 건 당연한 흐름이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붙잡는 건 결국 모든 걸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이런 설명 불가능한 고통의 설명, 이해, 책임의 귀속을 찾기 위해 우리는 신을 찾는다.

마침내 빅터와 다시 마주한 순간, 괴물은 그동안의 절망과 고독, 분노를 모두 터뜨린다.


모든 감정을 터뜨린 괴물은 자신을 강하게 붙들었던 분노마저 사라졌음을 느낀다.


이제는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괴물의 고백. 처음으로 괴물의 이야기를 들은 빅터는 비로소 괴물의 깊은 절망과 고통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직감한 빅터는, 무력감에 빠진 괴물의 손을 붙잡고 말한다.

“미안하다… 후회가 뼈에 사무쳐. 이제야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구나. 용서해 다오, 내 아들아.. 그리고 마음이 내킨다면, 스스로 용서하고 네 존재를 받아들여.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걸 생각해라, 아들아. 살아있는 동안엔 네게 주어진 길을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걸.. 살아라”

그 한 문장이, 내 삶을 바꾸었다.

빅터의 “미안하다”는 말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설명되지 않던 고통이 비로소 설명되고 이해되며 책임의 자리를 찾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괴물을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한다. 빅터 역시 인간이라는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물은 그 불완전한 사과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책임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다.


실체 없던 고통에 실체가 부여되고, 이름 붙일 수 없던 고통이 설명되며, 떠돌기만 하던 분노가 향할 대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사실 자체가 괴물에게는 위로였다.

이 위로는 작품 밖에 있는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앞으로도 괴물과 내가 가진 결핍은 완전히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의 마지막 말을 들은 괴물이 다시 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나 역시 그 문장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었다.

이처럼 타인의 서사를 통해 자기 고통의 구조를 파악하게 만들고, 해답을 주지 않으면서도 고통의 의미를 재구성하게 만드는 힘. 나는 이것이 문학작품의 진정한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기 전의 나는 결핍이란 완전히 파악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와 동일한 결핍을 지닌 괴물이 그 결핍으로 인해 고뇌하고, 분노하고, 마침내 위로받는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결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음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즉, 결핍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 해석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결핍이 지닌 실체를 이해하고, 그것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인데도,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막막함과 무력감은 서서히 소멸했다.

이 만족스러운 경험은 오래전 깊숙이 묻어두었던 꿈의 존재를 다시 자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글을 쓰고, 분석하고, 생각하는 일을 좋아했지만,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재능이 있는가' 와 같은 현실적인 조건과 두려움 때문에 나는 경찰공무원과 같은 더 안전한 선택지를 택해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해보려 한다.


이는 단순히 감동이 잠들어있던 열정을 깨웠기 때문만이 아니다.


작품을 통해 ‘설명되지 않던 나의 결핍이 설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목격한 순간,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글을 써왔던 이유 역시 같은 구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결국, 말로 붙잡히지 않던 나의 고통과 결핍을 스스로 해석하고 설명해 내는 과정이었다.


이해받지 못한 존재가 스스로를 이해 가능한 언어로 바꿔내는 일, 그것이 곧 글쓰기였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끝내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을 수 없는 나 자신을 위해 쓴다. 글쓰기는 나의 결핍을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빅터의 진정성 있던 사과가 괴물의 고통을 명명하고 귀속시켜 주었던 것처럼, 내 안의 설명되지 않던 고통을 언어라는 방식으로 구조화한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록 결핍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나는 더 이상 무력한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이것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결핍을 안고도 삶을 살아내기 위한 나만의 자세다.


오래도록 이어온 안전한 길에서 벗어나, 미뤄왔던 새로운 꿈의 첫걸음을 지금,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