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빅터 프랑켄슈타인 분석
“대위님은 신을 믿지 않으십니까?”
“아니, 신을 믿어 지독하게. 하지만 그건 축복을 통해서가 아니야. 저주를 통해서지. 만약 신이 없다면 누가 이 세상을 이런 지옥으로 만들 수 있겠어?”
빅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빅터가 신을 찾는 이유부터 알아야 한다.
[빅터가 신을 꾸준히 찾는 이유]
: 빅터의 상실은 '설명되지 않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빅터가 경험한 모든 상실에는 '의미가 없다'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유도, 설명도, 목적도 없는 상실이었다.
겉으로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
어머니는 그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에 의해 죽었고, 아버지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의 방화 속에서 빅터를 구하려다 죽었다.
이렇듯 인과관계가 명확해 보이기에,
"이유도, 설명도, 목적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의미가 없다고 본 이유는,
그 죽음의 인과관계가 빅터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건 단지 사회가 말하는
원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논리는 이렇다.
· 어린 빅터가 불에 탄 어머니 시신을 끌고 옴.
-> 말도 안 돼. 이건 마녀의 짓이야.
· 마녀다. 이 집안은 저주받았어.
-> 불을 지르자. 없애버리자!
· 불을 지름.
-> 우린 이제 안전해. (빅터의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이 논리 속에서 빅터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는 살리고자 했으나, 결과는 언제나 죽음이었다.
자신의 의도와 세계의 반응이 완전히 뒤틀려
돌아온다는 감각 속에서, 이 세계는 빅터에게
더 이상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네 행동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도, 그것은 단지 사회의 언어일 뿐.
빅터에게 모든 사회적 인과는
아무 위로도 설명도 되지 않는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설명되지 않는 상실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실은 결국
세계의 악의성(= 마을 사람들의 비난과 방화),
혹은 신의 침묵으로 수렴된다.
빅터는 그 침묵에 깊이 분노한다.
그것은 자신이 겪는 고통이 아무 이유도 없다는
선언과 같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빅터는, 기어코 스스로 신이 되기를 자처한다.
"이 모든 부조리가 무엇 때문인가?"
"이 세계는 나에게 왜 이렇게 잔인한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
결국, 빅터는 [구원]을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아니다. [설명되지 않는 상실]에 대한 [이해와 설명], 그리고 [책임의 귀속]을 묻기 위해 신을 찾는다.
프뮤라를 볼 당시에, [나는 왜] 넘버에서 진심으로 생명 창조와 앙리를 비교형량 하는 빅터를 보고 경악함과 동시에, 빅터의 심리구조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는, 빅터가 '상실에는 이유가 없다'라는 전제가 깔린 사람이었다고 볼 때, 비로소 납득이 된다.
앙리가 살인자 누명을 대신 뒤집어썼을 때,
빅터 머릿속에는 두 가지가 정면충돌한다.
삶의 의미였던 신념(=생명 창조)
vs 자신의 의미가 되어버린 친구(=앙리)
즉, 상실의 부조리에 대한 반항과
반항을 가능하게 해준 존재.
이 둘을 비교형량 하게 된 것이다.
빅터는 치열한 고뇌 끝에,
[앙리 > 생명 창조]라고 결론 내린다.
이 선택은, 빅터에게 있어서
거의 존재론적 배신 수준이다.
자신이 평생 지켜온 삶의 의미,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신념을 버리고, 앙리를 택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앙리는 빅터의 선택과는 반대로,
빅터를 위해 죽음을 택했다.
“날 위해 울지 마. 이것만 약속해.
어떤 일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빅터가 지키려던 의미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깊은 죄책감이었다.
빅터는 누군가를 [소중하다]고 인식할 때 항상 [죄책감]이 감정의 밑바닥에 깔린다.
· 어머니 죽음 ->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죄책감)
· 아버지의 죽음 -> 나 때문에 불이 났고, 나를
구하려다 아버지가 죽었다 (=죄책감)
· 앙리의 죽음 -> 원래 이것은 내 죄였는데,
또 나 때문에.. (=죄책감)
계속해서 이러한 구조를 겪다 보니 빅터에게
[사랑], [우정]과 같은 의미는 결코 건강한 긍정 감정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심리적 구조가 깔리게 된 배경의 트라우마가 너무 컸는지, 빅터는 그런 감정이 들 때면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끊어내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소중한 사람이 자신과 엮이는 순간 불행해질 것이라 믿기 때문에, 줄리아와 엘렌, 룽게에게조차 거리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즉, [소중함]이라는 감정 자체가 빅터에게는
[죄책감의 뿌리]를 자극하는 신호이기에,
빅터에게서 [의미]와 [죄책감]은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죄책감]이 결국
빅터의 [핵심 트라우마]이자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명되지 않는 상실에 대한 죄책감]이다.
이러한 구조는 앞서 언급했던,
비교형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빅터에게 [생명 창조]란 부조리에 대한 반항인 동시에, 트라우마로 인해 생긴 일종의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근데 이를 고수하기 위해 앙리를 죽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부조리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재현이 되므로, 빅터는 생명 창조를
포기하고 앙리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한, 핵심 동력이
바로 [죄책감]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로부터, 빅터는 자신의 신념, 부조리에 대한 반항, 의미. 이런 것들 보다 죄책감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빅터는, 자신이 창조한 괴물에게
죄책감을 느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빅터는 괴물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빅터는 "내가 괴물을 만들었다, 내가 잘 못했다"
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반복하는 괴물에 대한 인식은 이렇다.
"또 잃었다. 또 모든 게 내 탓이다. 멈춰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 [죄책감]때문이 아니라
[자기 파괴적 절망]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빅터는 이 절망을 견디지 못해
영원히 [회피하기]를 선택한다.
이 회피는, 빅터가 괴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앙리와 겹쳐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괴물은 앙리의 죽음 위에서 탄생한 존재이다.
빅터에게 앙리 죽음 이후 생명 창조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앙리를 되살리는 의식이었다.
따라서 빅터의 논리는 단순하다.
[앙리가 아니다 -> 실패]
이 결론이 나는 순간,
괴물은 [생명] 이전에 [실패한 결과물]이 된다.
즉 빅터에게 괴물이란, 하나의 독립된 생명이 아니라 앙리를 잃은 결과이자 부조리에 대한 반항 실패의 흔적이며, 동시에 부조리 그 자체이다.
그래서 빅터가 괴물을 볼 때 떠올리는 것은
'내가 고통받는 생명을 만들어냈다'는 자각이 아니라
앙리를 향한 죄책감, 자기 자신을 향한 절망과 혐오,
반복되는 상실에 대한 분노뿐이다.
또한, 빅터는 이해할 수 없는 앙리의 죽음을 견디기 위해, 잠시나마 포기했던 생명 창조에 자기기만적인 의미를 다시 부여하여, 삶의 의미를 붙잡았다.
문제는, 괴물을 독립된 생명으로
인식하는 순간 발생한다.
그 순간, 빅터는
나의 생명 창조는 실패했고,
앙리의 죽음은 내가 만든 망상으로 덮어버린
무의미한 죽음이었으며,
나는 소중한 친구의 죽음을 이용한 사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기에,
빅터는 끝까지 괴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 한다.
결국, 빅터의 세계에서 괴물은 끝내 존재하지 못 한다.
그 세계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앙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