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밥상, 돌고 고는 인생
"보글보글"
찌개가 끓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어봤을 흔하디흔한 그 '된장찌개'.
지금 당장 어느 집 밥상에 올려두어도 어색하지 않을 그 된장찌개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내 기억 속의 첫 된장찌개는 할머니 댁에서 시작되었다. 홀로 사셨던 할머니는 나와 언니가 놀러 갈 때마다 별다른 반찬 없이 듬성듬성 썰어 놓은 김과 김치, 그리고 갓 끓인 된장찌개를 내주셨다. 그중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음식이 바로 된장찌개였다. 김이야 어디에서 먹든 비슷한 맛이었고, 너무 폭삭 익어버린 할머니의 김치는 어린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된장찌개는 좀 달랐다.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어린 나에게 가히 '신세계'였다.
짭조름하지만 달짝지근하고, 깊이 있지만 너무 무겁지 않아 계속 손이 가는 맛이었다. 다른 반찬 하나 없이도 된장찌개 하나만 두고 공깃밥 두, 세 그릇을 뚝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된장찌개 하나만으로도 할머니 댁에 갈 이유가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된장찌개를 맛보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나는 마르고 닳도록 온종일 된장찌개의 맛을 칭찬했다. 그런데, 당시의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할머니의 된장찌개에 홀려버린 나에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배추김치는 물론이고 열무김치, 동치미, 고사리 무침에 굴비찜까지. 매 끼니를 한 상 가득 차려주던 엄마에게 이날의 서운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빠 역시 엄마의 이런 감정을 눈치챘는지 할머니의 된장찌개가 맛있다는 나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내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 엄마는 나에게 슬쩍 다가와 '인공감미료'를 넣으면 모든 음식이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아마 엄마는 그때 내가 '인공'이나 '감미료' 따위의 단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나의 음식이 아닌 '시어머니의 음식'에 더 감탄하다니, 한참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해하고는 엄마에게 많이도 미안했다. 나는 어른들도, 아니 엄마도 '질투'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된장찌개'를 통해 조금씩 배운 것이다.
그 이후로 엄마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된장찌개를 만들어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어디선가 들은 레시피로 시판 된장과 집된장을 섞기도 하고 차돌박이나 조개, 새우 등을 잔뜩 넣어 그야말로 보양 된장찌개를 끓이기도 했다. 음식 솜씨가 제법 좋은 엄마는 모든 종류의 된장찌개를 자신의 손맛에 맞추어 맛깔나게 소화해냈다.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맛있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할머니의 된장찌개에서 느낄 수 있던 그 어떠한 '맛'이 부족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늘 뜨겁기보다 따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할머니의 된장찌개를 맛볼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는 너무 일찍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세월이 꽤 지났지만 지금도 내 배를 쓰다듬어 주시던 따뜻한 손과 눈이 오면 털신을 챙겨주시던 뒷모습, 그리고 뇌출혈로 쓰러지시기 전 마지막 힘을 붙잡고 나에게 전화를 거셨던 할머니 마지막 목소리가 모두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그리운 것은 보글보글 끓는 할머니의 된장찌개다. 소리부터 따뜻했던 그 된장찌개는 방 안과 동네 골목 어귀를 가득 채우곤 했다. 할머니의 된장찌개가 끓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내가 왔다는 것을 알 정도였으니 말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한참 동안 궁금했다. 과연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무엇이 달랐던 걸까, 정말 엄마 말대로 마법의 가루 때문이었던 걸까?
평생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여겼던 이 난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아주 의외의 곳에서.
나는 성인이 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줄곧 엄마와 떨어져 살았다. 서울 드림을 꿈꾸고 상경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달 음식과 패스트푸드의 노예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물론 그 음식들은 아주 맛있었고, 훌륭한 한 끼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팠다. 그렇게 허기짐을 안고 두 달 만에 내려간 고향에서 나는 그만 된장찌개 맛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엄마의 밥상이라고 생각했다. 된장찌개를 가득 실은 숟가락이 내 입속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말 이상하게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된장찌개에서 특별한 맛이 났다.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맛보았던 바로 그 맛. 입안을 감도는 긴 여운과 구수함. 이 맛은 영락없이 그때 그 맛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에 걸쳐 내 기억도 왜곡됐을 터이다. 할머니의 된장찌개 맛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맛보다는 맛의 '온도'가 그러했던 것 같다. 종일 찬 바람 부는 골목을 뛰어다니다 꾀죄죄한 얼굴로 돌아와 맛보았던 그 한 숟갈. 그때의 황홀한 맛은 서울살이의 갑갑함을 단번에 내려주는 엄마의 된장찌개 맛과 다르지 않았다. 왕복 2시간이 넘는 지옥철을 타는 일도, 아르바이트를 마치자마자 조별 과제를 시작해야 하는 일도 이제 막 익숙함으로 포장하고 있던 서울살이의 고단함을 된장찌개는 모두 알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고기도 조개도 모두 사라지고 투박함만 남은 엄마의 된장찌개. 보통은 즐겨 찾던 식당의 음식 맛이 변하면, '초심을 잃었다', '주인이 바뀌었다' 등의 이야기가 먼저 튀어나오기 마련이지만, 엄마의 된장찌개 맛이 변한 것은 어쩐지 참 서글펐다. 엄마도, 나도, 된장찌개의 맛도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왜 그리 맛있고 왜 그리 슬프던지, 눈물을 꾹 참으면서도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한 나는 얼마 전 새로 전세방을 얻었다. 전셋집이라고 하기는 조그맣기도 하고, 어쩐지 집보다는 방이라는 공간이 더 따뜻해 보여서 내 마음대로 전세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이사하던 날, 당신이 신혼 때부터 쓰시던 주방 도구와 그릇 등을 잔뜩 가져다 두셨다. '그런 거 있어도 안 써!'라고 한사코 거절하는 내 의견은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자리도 잡았으니, 집에서 밥이라도 좀 해 먹으라며 쓰지도 않을 뒤집개, 주전자, 만두 찜기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엄마였다. 그렇게 엄마와의 하루를 보내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엄마의 빈 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던 어느 날, 나는 엄마가 가지고 온 식기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곳에 사는 나는 정작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참 꼼꼼히도 정리해놓고 간 엄마의 손길. 그 온기가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다.
그릇들 사이에서 엄마의 된장찌개가 끓던 뚝배기도 보였다. 이미 뚜껑 손잡이가 여러 번 떨어져 식기용 접착제로 이어 붙여놓은 낡은 뚝배기. 하지만 무엇을 넣고 끓여도 맛있을 엄마의 뚝배기.
잔소리 같던 엄마 말이 생각나 그날 저녁으로 직접 된장찌개를 끓여보기로 했다. 슈퍼에서 난생처음 애호박을 사고, 찌개용 두부를 골랐다. 버섯과 파 등 넣고 싶던 재료도 한가득 샀다. 그런데 재료는 왜 그렇게 많이씩 파는지....... 한 번 먹을 양만 빼고 손질한 재료들을 몽땅 냉동실에 넣어두고 나니, 반찬 투정을 하던 어린 날의 내가 괜스레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가 가져다준 된장을 먼저 풀고,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때 재료를 하나씩 넣었다. 셰프의 레시피를 참고하거나 엄마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나의 첫 된장찌개는 어깨너머로 보았던 내 기억에 의존해 혼자서 끓여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날의 된장찌개 맛이 어땠을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보글보글"
다시, 된장찌개가 내 식탁 위에 올랐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어봤을 흔하디흔한 그 '된장찌개'.
그러나 어느 집 하나 똑같은 맛을 내지 않는 된장찌개.
나도 언젠가는 집마다 풍겨 나오는 그 따뜻한 찌개의 맛을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