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프로그램의 제작 소식이 알려진 게 벌써 수개월은 된 것 같다. 대표적인 여행 크리에이터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의하루가 스타 PD인 김태호 PD와 함께 새로운 여행 프로그램을 찍는다는 소식이었다. 세 사람의 영상을 좋아하는 팬들은 당연히 언제쯤 방송이 될지 오매불망 기다렸을 것이다.
프로그램은 간단하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주사위를 던져 여행지를 결정하고 그에 맞춰 세계여행을 한 후 가장 많은 점수(조회수+좋아요)를 얻은 우승자가 우주여행이라는 상품을 획득하는 구조다.
몇 번의 연기와 지연 끝에 마침내 방송된 <지구마불 세계여행>. 3월 2일 각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고, 3월 4일 ENA에서 TV판이 첫 방송되었다. 결과는?
…굳이? 왜?
첫 영상과 첫 방송을 모두 보고 나니, 이 프로그램을 망치는 몇 가지 악재가 보인다.
첫째, 설계의 한계다.
방송 전에는 이미 확고히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곽X빠X원이 김태호 PD를 만나면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기존의 여행 컨텐츠에 대결과 무작위성이라는 요소를 더했을 뿐이다. 부루마불도 우주여행도 더 이상 새로운 소스는 아니다. 모든 것이 통제되는 방송에서나 랜덤플레이가 새롭지, 항상 예측불허의 상황과 조우하는 것이 일상인 여행 크리에이터들과 그 영상의 팬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 초반부에서 김태호 PD는 이전 <무한도전>에서처럼 멤버들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 [멤버들에게 도전과제를 설명한다 → 멤버들이 당황하지만 도전에 응한다 → 좌충우돌하며 도전을 수행한다]의 공식을 이번에도 충실히 활용한다. 그러나 크리에이터들은 단순한 출연자가 아니라 자기 채널의 PD이자 작가이고 촬영자다. 그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기존의 출연자-PD의 역할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처럼 보여 안타까울 뿐이다.
둘째, 포맷의 퇴보다.
얼마 전 MBC에서 방영됐던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껏 보지 못한 극사실주의 여행 예능이라 해놓고, 날것의 영상에 패널들의 감탄사를 끼얹었던 것이 아쉬웠다.
출연자가 여행을 하고, 그 영상에 대해 스튜디오의 패널들이 이런저런 리액션을 하는 포맷이 아직도 유용하가? 연예인 패널들의 감탄사가 몰입을 방해하지는 않는가? 이미 너무 닳을 대로 닳은 형식은 아닌가? 여행 예능뿐만 아니라 온갖 리얼리티 예능에서 수없이 봤던 것 아닌가?
물론 패널을 빼면 유튜브 영상 3개를 TV식으로 좀 더 꾸며서 내보낸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태호 PD의 이름을 건 것치고는 너무 쉬운 선택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셋째, 실행의 지연이다.
12월에 공개한다던 프로그램은 2월로 연기(사실상 3월), 라이브는 1시간 지연, 저녁에 공개한다던 영상은 자정에나 올라오고 심지어 분량도 부족하다. 어떤 크리에이터도 이렇게 하고 살아남지 못한다. 유튜브에서는 1분만 늦어도 난리가 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TV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7시 방송할 프로그램이 1시간이나 늦게 송출됐다면? 아마 엄청난 방송사고가 될 것이며, 담당자는 시말서든 경위서든 쓰고 징계를 받을 것이다. 유튜브에서의 시간은 TV 방송보다 더욱 민감하다는 것을 제작진은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들어 방송이 유튜브를 흉내내려고 하는 시도가 눈에 띈다. 단순히 어떤 것이 화제가 되니까, 화제의 인물이니까라는 이유로 억지로 끌어오려고 한다면 역효과만 날 것이다.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그것을 방송에 적용시키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다면 고가의 장비로 촬영한 고화질 유튜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매우 재미없으며 비용만 많이 소요된.
그래도 아직은 애정을 갖고 <지구마불 세계여행>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 곽X빠X원의 여행 영상은 그 자체로도 볼 만하므로 앞으로도 챙겨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셋의 영상을 본 사람들이 굳이 TV판까지 챙겨볼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PD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