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오니다온 Dec 15. 2020

<밤을 걷다>_꿈에 카메라를 가져갈게


"꿈도 죽음도 정처가 없네. 가는 데 없이 잊혀질 거야.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다 사라지고 밤뿐이네. 안녕"

나 그때 네가 꿈에 나온 이후로 꿈을 기억하는 연습을 아주 오래 했어. 그러다가 내 꿈에는 색도 있고 촉감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냄새는 맡아본 기억이 없네. 다음에 꿈을 꾸면 알아볼게. 꿈을 너무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건강하지 못하다는 주변의 걱정에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어. 

그때 나는 다 진심인 듯 온통 거짓이었고, 꿈에서만큼은 거짓 없이 진심일 수 있으니까.



사실 꿈을 꾸는 동안은 이게 꿈인 걸 모를 때가 더 많아.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의식이 먼저 깨면, 눈을 뜨기 전에 차근차근 꿈을 되새기는 거야. 섣불리 처음을 기억하려고 하면 모든 것을 잊으니 최대한 가까운 장면부터. 그 전은 뭐였더라, 하면서 하나씩 조각을 맞춰. 그러면 꿈을 기억할 수 있어. 충분히 꿈을 되짚고 나면 천천히 눈을 뜨고, 손을 뻗어 종이를 집어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며 꿈을 적는 거야. 연습을 하다 보니 이젠 잃어버리는 꿈만큼이나 기억하는 꿈이 많아졌어. 이상하게 내가 연습을 하니까 너는 꿈에도 안 나오더라. 미끄러지듯 사라져 버렸니?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남자에게 꿈을 기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


그 밤에 삼천구백 원짜리 싸구려 와인이라도 같이 마셔볼 걸. 그럼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할 수 있었을까? 걷고 걷고 너무 걸어서 자꾸만 운동화 끈이 풀리던 밤은 흑백으로 남아있어. 그러면 너는 몸을 낮게 웅크려 내 신발끈을 묶어주곤 했잖아. 여름의 가벼운 바람에 살랑거리는 네 머리카락을 만지는 순간을 참 좋아했는데. 이상하지? 네 말들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색이 기억이 안 나. 바보처럼 20분짜리 단편 영화를 보다가 엉엉 울었어. 그날 네가 입었던 옷의 색이 못 견디게 궁금해서, 네가 흑백 영화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자비에 돌란 말고 너는 또 어떤 감독을 좋아하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네가 자꾸만 흐릿해져. 내가 너를 잊어가는 순간이 두려워서 또 울었어.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어. 다 사라져 버리고 남은 건 정말이지 밤뿐이네. 수신인 없는 편지는 자꾸만 쌓여가고 울어야 할지 울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밤은 자꾸만 지나가. 너는, 혹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도 슬퍼하지 마. 그리고 괜찮다면 간간이 내 꿈에 나와줄래? 앞으로는 꿈에 카메라를 가져갈게. 네가 나온 장면을 찰칵, 찍어서 흑백으로 인화할게. 다이어리 맨 앞 장에 꽂아 두고 매일 펼쳐 볼게. 온통 흑백인 세상이라도 좋으니 같이 걷자.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이 길에서, 손을 맞잡고,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도 괜찮고 딱 20분이어도 괜찮으니까,


난 혹시 모를 날을 위해 매일 꿈을 기억하고 또 기록할게.

너는 나를 무엇으로 기억하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