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하여-
싸이보그여도, 나와 다른 종이라고 해도 그저 존재만으로 '괜찮아'를 외칠 수 있는 믿음의 언어가, 그 비정상의 신세계가 문득 그리워진다.
누군가를 향한 믿음은 곧잘 그를 향한 기대로 둔갑한다. 혹여 그가 실패했을 때, 신뢰를 표하던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기대를 배반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가장 먼저 돌아서기도 한다. 믿음의 언어들은 위태로워서 날카로운 비난의 언어 앞에서 맥없이 흩어진다. 그럼에도 흩어지지 않는 타인을 향한 온전한 믿음들은 주로 괜찮아, 라는 언어로 가시화된다. 네가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아, 설령 네가 싸이보그여도 괜찮아.
스스로를 전기로 작동하는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은 자신의 몸이 고장 날 것을 우려하여 음식을 일절 먹지 않는다. 일수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인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옷을 훔치는 등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현재 영군과 일수는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신세계 정신병원'에 머무르는 중이다. 영화 초반, 감독은 환자 오설미의 입을 통해 앞서 언급한 두 인물을 비롯한 환자들의 기이한 모습을 늘어놓는다. 오설미의 이야기는 그들의 비정상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듯 보이지만, 의사처럼 그들을 병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환자들의 개별적인 사연에 주목하여, 의사들이 규정한 비정상의 기저에 놓인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그녀의 시선에서 모든 인물들은 '비정상'으로 범주화되기보다는 순수에 가까운 모습으로 존재한다.
싸이보그여도 괜찮다, 고 말해주는 이 영화는 결국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이들이 정상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보다 훨씬 능숙하게 타인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과정을 조망하는 영화다. 영군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의사들은 영군의 코에 호스 줄을 연결하여 미음을 밀어 넣고, 심지어는 부작용이 심한 전기 치료를 강제로 시행한다. 일수는 고통스러워하는 영군의 모습을 보며 잃었다고 생각했던 동정심을 느끼게 되고, 서툴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영군에게 다가간다. 그는 영군이 싸이보그임을 신뢰하는 ‘척’하며 밥 열량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기계를 영군의 몸에 이식하는 ‘척’ 한다. 그것은 영군이 경험한 최초의 ‘믿음’이었다. 그녀는 그 기계를 이식(했다고 인지)한 후 드디어 밥을 먹기 시작한다.
신세계 정신병원 안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신세계’를 구축해나간다. 서로를 향한 무한한 믿음과 응원으로 비정상으로 규정되던 일상의 세계를 탈피한다. 그들의 단단한 믿음은 상대의 견고한 벽을 허물어내며 서로에게서 긍정적인 변화를 견인해낸다. 그들의 신세계는 참으로 소박한 것이다. 밥을 먹지 못하는 영군이 밥을 먹을 때 숨죽여 응원하는,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는 그런 일들이다. 철장으로 갇힌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종이컵으로 전화기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며 함께 푸른 들판을 달리는 상상을 하는 것들이다. 단순히 그들이 누군가에 의해 ‘비정상’으로 규정되었기에 박탈당한, 그러한 일들이다.
영화는 독특하게도 붉은색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공장에서 일을 하던 영군은 자신의 손목을 긋고 상처 부위에 전선을 연결하는데, 영군이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음에도 붉은 조명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여공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또한 가장 강렬한 붉은 조명 아래에서 자신이 싸이보그임을 밝힌 영군에게, 그녀의 엄마는 순대를 억지로 먹이며 그 사실을 숨기고 침묵하기를 종용한다. 그러나 영군의 '신세계'는 붉지 않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영군의 침대 불빛은 온통 푸른색이다. 침대를 벗어나 있을 때는 항상 파란색 가방을 들고 다니며, 하얀맨이 등장하지 않는 거의 모든 공간에는 푸른색이 존재한다. 영군이 처음으로 밥을 삼켜내는 식당은 파란색의 풍선으로 가득하며, 어느새 영군의 파란 가방을 받아 든 일수는 그 자체로 영군에게 안정이 되었다. 영군과 일수는 그들만의 신세계를 일군다. 영화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는 세상에 편재하는 믿음과 불신의 무작위적 교차를 가시화시키며, 사실상 불신의 폭이 훨씬 크기에 붉은 이미지가 지배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들이 구축해내는 믿음의 가치는 극대화된다.
희망 없이도 힘을 낼 수 있다. 세상이 바뀌리라는 희망이 아닌, 서로를 향한 믿음에 뿌리를 둔 삶에 대한 의욕은 존재할 수 있다. 때론 믿음에 있어 언어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통렬히 느낀다. 영군과 일수의 믿음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타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층위의 것이었기에, 그럼에도 그 믿음이 존재의 증거가 되고 생존의 이유가 되었기에, 나는 감히 그들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당신도 괜찮다. 실은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소외된 그들에게만 유효한 언어가 아니라, 정상의 범주에 존재하는(한다고 믿는) 우리에게도 필요했던 언어가 아닐까. 싸이보그여도, 나와 다른 종이라고 해도 그저 존재만으로 '괜찮아'를 외칠 수 있는 믿음의 언어가, 그 비정상의 신세계가 문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