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 영화의 줄거리가 담겨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건 마음이 부서져내린 날이었다. 처음엔 맥주 한두 잔으로 시작해서 아무리 더 마셔도 나아지지 않아 나는 그 밤을 포기하고 영화를 한 편 보기 시작했는데, 그게 <야구소녀>였다. 잘생긴 이주영의 모습이 돋보이는 포스터를 기억해내며, 멋쁜 10대 여성의 청량한 스포츠 성장물로 기운을 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내렸던 그날, 내가 영화의 첫 장면으로 목격한 것은 야구천재 소녀의 빛나는 모습이 아니었다. 교장실 밖 어둡고 차가운 복도에서 양옆으로 줄서 기다리던 선수들 중 한 명만이 프로로 스카웃되었다는 결과를 듣고 모두 돌아서는 모습이 이 영화의 첫 씬이었다. 주수인을 포함해서.
주수인은 여성 최초로 고교 야구단에 들어가면서 언론에서 천재소녀라고 불렸고, 졸업반인 지금도 시속 130km에 달하는 구속을 던질 수 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 던지는 '여성'은 거의 없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프로구단에 스카웃되려면 시속 150km은 던져야 하는 현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야구 천재지만 여성이기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다가 어느 순간 진가를 발휘해 본때를 보여주고 그리하여 모두가 놀라 머쓱해지거나 당황하게 만드는, 보기만 해도 가슴 벅찬 그런 멋진 10대 여성은 등장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지만, 그날 결국 나는 더욱 무겁고 축축해진 마음을 안고 옆으로 쭈구리고 누워 잠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꾸만 이 영화가 뭔가 모르게 마음에 남아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결국 한 번 더 영화를 봤다.
주수인은 고교 야구단의 다른 선수들보다 체구도 작고, 손도 작다. “리틀 야구단 때 야구했던 애들 중에 지금까지 야구 하는 사람 너랑 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친구(남성)는 유일하게 프로구단에 스카웃되었지만, 그 남자애보다 “중학교 때 손도 더 크고, 키도 더 크고, 야구도 더 잘했던” 주수인은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할 거냐고 매일 엄마의 다그침을 받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야구단 감독은 성실한 고3 담임처럼 주수인과 졸업 상담을 한다. 마침 교내에 여자야구 한국대표선수(프로 여자야구단은 없기 때문에 월드컵 때만 뛰는 국가대표이다. 그래서 별개의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로 활동하는 여성 교사가 있어, 그녀를 불러다 주수인에게 도움을 주려고도 하지만, 주수인은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당혹스러움은 안중에도 없다. “전 야구 계속할 거예요.”
그녀를 서둘러 포기시키려는, 또는 야구를 하고 싶은 그녀를 서둘러 포기한 듯한 주변 어른들의 반응이 수인은 되려 당혹스럽다. 너 같은 애는 프로가 될 수 없다, 니가 뭐 잘난 줄 아느냐고 화를 내는 새로운 코치에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왜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해요?”라고 주수인은 묻는다. 이 말은,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단정 짓는 이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또한 순수한 물음으로서의 질문이기도 하다. 미래를 누가 아는가. 뭔가를 하지 않았는데 결과를 어떻게 아는가.
주수인은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공을 던지고,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며, 더 혹독하게(정확히는 뭐라도 해보자는 식으로) 훈련을 한다. 이거 아주 클리셰구만. 그래, 지옥의 훈련으로 더 높이 도약해서 본때를 보여주자! 이제라도 스포츠 청춘물로 돌아가는 거야! 라고 나는 외치고 싶었지만, 주수인이 아무리 악을 쓰고 던져도 구속은 130km도 넘기기 어렵다. “150km만 던지면 프로 가는 거 아니에요?”라고 눈을 부릅뜨지만, 분한 마음을 그녀의 육체가 넘어서지 못한다. 물리적 한계.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비슷한 무력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달리기를 나보다 못했던 남자애들이 더 잘 달리고, 나보다 허약했던 남동생이 체격이 더 좋아져서는, 내가 골골거릴 때 뭘 해도 힘을 덜 들이고 하는 걸 보며, 분한 마음이 들곤 했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뒤떨어지게 된 것이 속상하고 분했던 기억. 분함을 지우고 내 육체적 조건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됐다.
1996년, 규약에서 이 문구가 사라진 뒤 여자도 프로야구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이 문구로 시작한다. ('의학적인 남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자.) 하지만 이 글을 썼던 2020년에도, 2022년으로 해를 넘긴 지금도 국내 프로 야구단에는 여자 선수가 없다. 여자 선수도 프로구단에서 뛸 수 있는 것으로 규약은 바뀌었지만, 투수에게는 구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임의 법칙은 바뀌지 않았고, 영화 속 주수인은 구속 150km를 던지지 못하므로 프로구단에서는 그녀를 택하지 않는다. 언뜻 공정해 보이는 이 룰에서 주수인은 혼신을 다해도 자꾸만 미끄러진다. 하지만 여전히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그녀에게는 멈출 이유가 없다.
그러나 주변 어른들에게는 그녀를 멈추고 싶은 이유가 있다. 프로구단에 가고 싶었으나 독립구단에서 40살 넘어서까지 선수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고교 야구단에 와있는 코치, 몇 년째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 중인 남편 때문에 속앓이를 하며 포기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딸을 다그치는 엄마. 그들은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며 주수인에게 화를 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지금 장난 치냐, 언제까지 그럴래. 세상이 그들에게 혹은 스스로 던졌을 말을 주수인에게 반복한다. 아빠는 몇 년째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고, 코치는 프로야구단에 가지 못했고, 엄마는 적어도 엄마가 되는 게 꿈은 아니었다. 어쩌면 재능이 없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너무 나이가 많거나, 처음부터 안 되는 것 아니었을까. 이미 다 글러먹은 것은 아닐까?
그런 목소리에도 아랑곳않고 포기할 기미가 없는 주수인을 결국 코치는 도와주기로 한다. 주수인의 공이 회전력이 좋다는 장점을 살려 너클볼을 던지도록 훈련시킨다. 드디어 트라이아웃에 나가게 된 날, 주수인은 너클볼과 직구를 영리하게 사용해 타자들을 아웃시킨다. 모두가 지켜보는 경직된 공기 속에서 담담하게.
긴장한 근육으로 그간 수없이 던졌던 방식으로 성실하게 볼을 던져내는 수인은 물론 멋졌다. 그런데 이 씬에는 의외의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있었다. 주수인이 구장에서 테스트를 받고 있는 한 여성 타자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관객 입장에서도 그 여성 타자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런 류(?)의 소위 여성 서사의 영화에서 주인공 여성은 그 분야의 유일한 여성으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내 시야가 담을 수 있는 삶 안에 보이지 않아도, 카메라 밖에도, 또 다른 여성이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영화의 그녀가 이쪽 프레임으로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수인과 그녀는 자연스레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다. 주변에서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둘만 알 수 있는, 서로를 발견한 순간. 둘은 말을 섞지 않지만, 서로의 플레이를 마음 졸이며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플레이처럼. 카메라는 서로를 향한 그들의 반응을 특별하게 바라보지는 않지만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담아낸다.
주수인을 흥미롭게 여긴 감독이 프로선수를 타석에 세우고, 주수인에 대한 테스트 강도가 높아지자 그 다른 여자 선수는 외친다. “주수인 파이팅!” 일면식도 없는 그들이지만, 그녀는 간절하게 외친다. 수인의 존재를 응원한다. 서로가 짐작할 수 있는 지금까지의 삶을 응원한다. 주수인이 너클볼로 프로타자를 잡기 시작하자, 다른 선수들도 주수인을 응원하기 시작하고, 결국 타자는 삼진아웃된다. 멋진 플레이.
의당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일 이 장면 이후에 주수인은 프로야구 구단에 입단하여 관객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영화는 또 한 번 내 기운을 뺐다. 주수인은 프로야구단 단장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하지만 야구단에서 제안한 것은 프런트 직원이었다. “지금까지는 여자라는 것이 단점이었겠지만, 여자라는 점이 같이 일을 하는 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는 설명과 함께.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분노와 함께 한편 먹먹한 기분이 들었지만, 주수인은 또박또박 말한다.
"빠르고 느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던진 공을 상대방이 못 치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 야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 저는 볼 회전력이 높아요. (...) 저는 다른 선수보다 힘이 약해서 구속은 느리지만, 그래도 이길 수 있어요. 느려도 이길 수 있다고요. 그게 제 장점이에요.”
이후 그녀의 트라이아웃을 다시 살펴본 구단에서는 그녀에게 프로 2군을 제안하고, 그녀는 결국 그녀가 원하던 대로 계속해서 야구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명쾌한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코치도, 구단장도 조심스레 말한다. “앞으로가 더 힘들 거야.” 아마 수인도 알지 않을까.
영화는 단 한 번도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 프로 2군 진출 후 넓은 구장에서 조용히 미소를 짓는 수인이 멋져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리틀야구단 때부터 여자애라고 괴롭힘을 당했고, 중학교 때는 천재 야구소녀라는 부담을 져야 했으며, 고교 야구단에는 여자 선수 규정이 없으므로 들어갈 수 없었으나 아빠가 학교에 빌어서 겨우 들어갔고, 다른 동료들과 탈의실을 같이 쓸 수 없어 화장실 한칸이 그녀의 공간이었다. 야구단에 여자애가 있네라는 말을 숱하게 들으며, 야구가 좋아 야구를 했다. 그동안 수인이 야구를 하게 뒀으면서 앞으로도 하겠다는 수인을 말린 주변 어른들은 자신들이 수인 앞에 갑작스레 그어버린 한계선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수인은 지금까지도 야구가 쉬웠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나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유일한 여자선수로 예외를 두며 ‘여자도’ 야구를 하도록 허락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이 그은 한계는 처음부터 주수인이라는 개인에게는 무관한 일이었다.
수인은 천재 야구선수가 아니다. 천재 야구소녀라는 호칭은 ‘여성치고’ 야구를 잘한다는 호들갑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수인도 그 호칭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인은 계속해서 야구를 하고 싶었고, 구속이 빠르지 않았기에 너클볼을 가장 잘 던지는 승률 좋은 야구선수가 되려 했다.
여자인 것은 단점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세상의 반응은 야구를 하는 것의 단점이었다. 그녀는 그 단점을 확인하며 이미 매순간 선택해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야구를 하기로 한 수많은 선택들. 그렇게 수인은 조금씩 단단해져왔을 것이다. 세상은 자신이 야구를 얼마나 하고 싶은지 매순간 확인하게 했으므로.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느 순간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주수인의 그 단단함이었다. 저렇게까지 비장하고 흔들림없는 것은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유일하게 청춘물 같은 부분이네, 라고 불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며 가만 따져보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설정이었는지.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에 차지 않았으면서도 이 영화가 왜 가슴에 남았었는지.
1996년부터 국내 프로 야구단에서 여자선수도 뛸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프로야구단에서 뛰는 여자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선수들 중에 여성이 한 명 있다, 가 아니라 프로야구에 대한 성별 인식이 달라지는 사건이 된다. 그 최초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가 살면서 만나는 세계의 인식 구조를 하나하나 뒤엎고 증명하고 또 증명해야 하는, 믿을 수 없이 어려운 일이다. 여자 프로야구선수가 없는 세계에서 사는 인류를 전 생애에 걸쳐 하나하나 설득하고, 문명을 바꾸는 일이 된다.
문명을 바꾸는 일은 수십년, 수백년이 걸리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인이 입학한 고등학교에는 야구가 좋아 야구를 하고, 프로야구단에는 들어갈 수 없었으나 여자야구 국가대표로 야구를 하면서 교사로 근무하는 여성이 이미 있었다. 수인이 트라이아웃을 나간 구장에는 어딘가에 있는지도 몰랐던 또래의 여자 타자 선수가 있었다. 주수인이 곧 졸업할 고등학교에는 한 여자 선수가 수인 때문에 입학을 하려 한다. 이들의 주변 어른들 역시 수인이 들었던 말들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미래를 망칠까봐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누가 아는가. 이들이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서로의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누군가의 현재가 그들이 만든 미래였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최초의 여자 야구선수로 기록된 인물은 1997년 고등학교 야구부에 입학한 안향미이다. 1999년 5월 1일 제33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전에서는 국내 유일 여성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2002년 4월에 일본팀에 진출해 투수와 3루수로 활동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2004년 3월 ‘비밀리에’라는 여자야구팀을 창단해 7월 여자야구 월드시리즈에 출전했다. 지금은 호주에 거주한다.
<야구소녀>의 또 다른 모티프인 김라경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리틀야구단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14살 이하 연령제한이 있는 리틀야구단에서 여자선수는 16살까지 뛸 수 있도록 '김라경 특별 룰'이 만들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2015년 중3 때 최연소 여자야구 대표선수로 선발됐고, 2020년부터 서울대 야구부 소속으로 대학리그에서 뛰고 있다. 현재 일본 프로 여자야구 리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