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하기
그녀는 또 한 번 작별인사를 한다. 일 년에 적어도 서너 번은 해야 하는 일이다. 떠나려는 이유를 차분하게 물은 다음 최대한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지막 근무 날짜를 체크하며 혹시라도 질척이지 않기 위해 신속히 인터넷에 접속해 알바 공고를 올린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신입으로 들어올 알바에게 교육할 과정들이 예고편처럼 펼쳐진다. 그 생각만으로도 피로감을 느낀다.
주말 알바 김유가 떠난다니 그녀는 걱정이 한가득이다. 김유는 10개월을 함께 일해오며 주말의 피크 타임 정도는 손쉽게 쳐내는 알바였다. 날씨가 더워지자 손님이 점점 늘었다. 그녀가 수시로 방문하긴 하지만 한 시간 동안 손님이 연달아 방문하면 설거지가 싱크볼에 가득 쌓인다. 근무자 1인 체제의 운영에서 2인으로 늘릴 필요가 있는 시기였다. 그렇다고 두 명을 고용하는 것은 인건비 지출에 부담이 되었다.
‘김유 씨, 요즘 알바 끝나고 집에 가면 힘들지 않아? 한 명을 더 뽑아서 시간을 좀 줄여줄까’
‘괜찮습니다’ 혹은 ‘바쁘긴 했지만 잘 해냈습니다’로 일관해왔다. (메시지 끝에는 항상 곰돌이 이모티콘을 붙인다) 과연 김유가 이력서에 쓴 습득력이 빠르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김유에게 처음 만든 디저트를 맛보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함박웃음에 더불어 양손 엄지를 세워 보이며 ‘정말 맛있어요’라고 말하면 그 디저트는 인기가 있었다. 만약 ‘맛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거나 ‘약간 o o o 맛이 덜 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그 디저트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살구 절임을 올린 생크림 케이크를 처음 만든 그녀가 김유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김유는 조심스럽게 케이크의 모서리를 포크로 떼어내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다가 0.5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살구가 달지 않고 상큼한데 생크림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 시트도 촉촉해서 너무 맛있어요’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사람에게 첫 시식을 해주고 싶을 것이다. 김유에게 말하진 않지만 그녀는 김유가 너무 귀엽다. 그런 김유가 졸업을 앞두고 오디션에 붙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섭섭하지만 그녀 또한 김유에게 양손 엄지를 세워 보였다. 그만둔다고 실망하는 모습보단 축하를 해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녀는 신입 알바를 맞이하기 위해 음료 레시피와 ‘카페 알바 수칙’을 점검하며. 기록 없이 자연스럽게 하던 일들을 일일이 찾아서 메모했다. 예를 들면 바나나 셰이크를 만들 때 바나나가 작다면 하나 반 을 넣고 바나나가 크다면 하나만 넣는 일. 카페가 아닌 일상에서 바나나를 먹는다면 크기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하나 먹고 모자라면 또 하나 까먹으면 되니까. 그러나 카페에선 평균 크기의 바나나는 중요한 사항이다. 따라서 평균 크기를 무게로 레시피를 정하지만 바나나의 당도에 따라 어느 날은 시럽 10그램이 더 들어갈지 모를 일이다.
‘수진 씨, 레시피 보고 음료 만드는 재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정확한 그램은 외우지 않아도 되니까 도구나 위치는 꼭 알아두세요, 모르겠으면 물어보세요’
카페 주방 안에서 텍스트의 힘은 약하다. 레시피는 글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외우기 쉽지 않다. 아무리 세세히 적어놔도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램과 밀리리터는 엄연히 다르고 티스푼과 테이블 스푼을 구분하는 것도 헷갈리기 마련이다. 교육 중인 알바에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듯한 시원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녀는 녹음기를 켠 듯 최대한 일관된 어조로 계속해서 물어본다. 재차 확인을 해야 실수들을 미리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 스스로도 지겨워서 최대한 감정을 뺀 채 처음 말하는 듯 미소를 장착하고 말한다.
여름이 카페 문 앞에 다가올 때쯤 그녀는 주말엔 2인 체제로 운영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신입 알바들을 교육하는 몇 주간 그녀의 눈 두 덩이는 움푹 파이고 진한 그림자가 생긴다. 그래도 여전히 미소를 띠고 녹음을 한 듯이 카페 수칙을 말하는 어쩐지 0.5배 느린 속도로 재생된다. 꼭 이를 물고 물어보는 사람 같다.
‘민영 씨, 레시피 보고 음료 만드는 재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정확한 그램은 외우지 않아도 되니까 도구나 위치는 꼭 알아두세요, 모르겠으면 물어보세요’
까끌하게 돋아났던 혓바늘이 그녀의 입속에서 사그라들면 알바들과는 손발이 맞고 수다의 시간도 생긴다. 깊지 않은 수다이지만 ‘요즘 애들’을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녀는 사실 ‘요즘 애들’과 친해지고 싶다. 그러나 고용주와 근로자 사이에서 투명한 우정을 키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 또한 20대 시절에 예고 없이 친밀하게 다가오는 사장과 적당한 거리를 지키려고 전전긍긍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굿바이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