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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레저 여행가 Aug 28. 2023

달콤한 마라탕

그깟 어학원 레벨테스트 87점이 뭐라고

학원에다 매달 엄청난 돈을 가져다 바치고 있습니다.


아들은 재수생입니다. 작년 대입에 실패하여 기숙 학원에 들어가 재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딸네미는 중3입니다. 내년 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죠. 아직 갈길은 멀고, 돈 들어갈 곳은 정말 쌔고쌨습니다. 공교육이 망가지고, 사교육에 의존하는 대한민국. 학원에서 선행 학습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현재의 교육 형태. 아이들 사교육비 대느라 등골 휘는 준비된 노후 거지 대한민국 부모들. 키울 자신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부부들. 전국 평균 출산율 0.78. 서울 0.59. 안타깝습니다.


'교육 분야에서의 혁신이 없다면 정말 대한민국은 소멸하겠구나'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나라냐! 한때는 이런 공교육 현실을 보며 울분을 터뜨렸습니다만, 그래봐야 제 속만 터지고 바뀌는 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변변찮은 대학 졸업하 취직 못해서 시간낭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돈 들여서 한 단계라도 더 높은 대학을 보내는 편이 장기적인 투입 비용을 생각하면 이익일 거라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던 선배 노후 거지님들의  충고도 한 몫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두 부부가 열심히 돈 벌어서 학원에 가져다 바치고 있습니다. 이제 100세 시대라죠. 노후대비? 비자금까지 탈탈 털어 학원비 내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돈 먹는 기계가 두 대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깡정'(재수생, 가명)과 '떠덩'(중3, 가명)이 생긴 건 되게 비슷하게 생겼는데 하는 짓은 딴판이라는 겁니다.


'깡정'군은 이런 스타일입니다.

"엄마! 나 이번 모의고사 잘 봤어. 한 85점은 나올 것 같아!"

"그래? 성적 많이 올랐네? 우리 아들 열심히 공부했구나! 수고했어. 오늘은 깡정 좋아하는 치킨 먹어야겠다."

며칠 후 성적표가 나왔습니다.

"아들! 모의고사 점수가 75점인데? 85점 맞았다고 안 했어?"

"75점??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찍은 게 다 틀렸나?. 다섯 개쯤은 맞을 줄 알았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네."

깡정이 만든 저희 집안 유행어입니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 구분법이 있죠? 16개의 성격 중에서, 깡정은 공부와 가장 맞지 않는다는 INFP입니다. 사교육에 들인 돈 대비 성적 향상, 즉 가성비는 가히 절망적인 수준입니다.


'우리는 너를 너무나 사랑한단다 아들아~!' 맥락 없는 사랑고백 이해 바랍니다. 아들이 가끔 제 글을 모니터링하거든요.



그나마 떠덩 쪽은 상황이 조금 양호 한 편인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는 집에서 멀지 않은 일반고인 S여고를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춘기 여중생의 마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법.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폭탄선언을 하더군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외고 진학 대비하여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나마 영어는 어느 정도 선행 학습이 되어있고, 중학교 성적도 나쁘지는 않았던 터라 고민해 보자고 했습니다.


며칠뒤 아내가 신촌에 있는 N 어학원에 레테(레벨 테스트)를 예약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 일단 외고를 갈 수 있는 상황인지 어떤지나 좀 확인해 보자면서요. 어렵게 토요일 낮 두시로 레테 예약은 했는데, 자기는 돈 벌러 가야 하니 저보고 떠덩이를 데려다주고 오라는 거였습니다.


레테 보는 날 아침 돈 벌러 가는 아내가  나가기 전에 저희 부녀에게 당부를 합니다.

"떠덩. 떨지 말고 실력 것 레테 잘 보고."

"여보. N 어학원이 우리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가는 게 상당히 애매하니까 두 시까지 떠덩이를 신촌 N 어학원에 좀 데려다줘. 그리고 레테 끝나면 떠덩이 데려와야 해."

마침 별다른 약속도 없어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떠덩. 그리고 레테 끝나면 시험이 어땠는지 결과를 엄마에게 문자로 보내줘. 엄마가 일 끝나면 전화로 원장님과 상담을 할껀데, 그전에 시험이 어땠는지 알고 싶으니까."


시간 맞춰서 신촌 N 어학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좀 쉬었다가 다시 레테 끝나는 시간 맞춰서 따님을 모시러 갔습니다.

"떠덩. 레테 어땠어? 잘 봤어?"

"아니.. 망했어. 몇 문제 틀린 것 같아..."

"구래? 시험이 어려웠어?

"지문이 두 개 정도 좀 어렵고 단어가 몇 개 어려운 게 있더라고. 평소에 학원에서 보던 거랑 비슷했나? 조금 어려웠나? 뭐 그 정도였던 것 같아."

"그런데 왜 망쳤어?"

"그게... 변명일지 모르겠는데, 난 이제까지 시험지로 보는 시험만 봤었고, 컴퓨터로 보는 디지털 시험은 처음 봤거든. 나는 영어 시험 볼 때 지문을 읽으면서 띄어 읽기랑 중요한 요점 같은 것들을 표시하면서 시험을 보는데, 컴퓨터로 시험을 보니까 그런 걸 못하니까 너무 어색하고 집중도 안 됐어."

"아 그랬구나~ "

"그리고 마지막 문제 풀 때 1분 20초 남은 것 보고 충분히 풀 줄 알았어. 막 답을 클릭하려는데 시험이 딱 끝나버리더라고. 3점짜리 문제 맞힐 수 있었는데...  ㅠㅠ"

"아~ 저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엄마한테 결과를 보내자. 뭐라고 보낼까?"

제가 떠덩이 레테 결과를 요약하여 아내에게 보낸 내용은 이랬습니다.

'점수는 80점대 후반에서 90점대 초반 예상. 리스닝은 다 맞은 것 같은데 실수로 한 문제 정도 틀렸을 수도. 리딩은 서너 문제 정도 틀린 것 같음. 마지막 문제는 풀었는데 마킹을 못했음. 시험이 별로 어렵진 않았는데 컴퓨터로 보는 디지털 시험은 처음이라 많이 어색했음."




아내가 일 끝나고서 N 어학원에 전화를 하여 원장님과 통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여보세요? 떠덩이 엄만데요. 저희 딸 레테 결과가 어떤가요?"

"아 네.. 떠덩양이요. 어디 보자.. 레테 결과가 52점이네요."

"네에~? 50점이요???"

"예. 52점인데요. 저희 어학원 레테 난이도가 좀 높아서요."

"아.. 그래요..."

"그렇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떠덩양을 어떻게 공부시키려고 하시는지요?"

"아이가 외고 진학을 하고 싶다고 해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레테를 본 건데요."

"음.. 저희 어학원 시험이 좀 어렵긴 하지만, 떠덩이가 외고 진학하기에는 준비가 많이 안된 것 같습니다."

"아.."

"떠덩이는 외고를 가니마니의 문제가 아닌것 같네요."

"그런데... 저희 아이가 평소에 지금 다니는 학원에서 모의고사 보면 90점 이하로는 받아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어떤 시험을 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저희 어학원 레벨테스트 수준이 높아서 그런 것 같군요."

"떠덩이는 레테 보고 나서 컴퓨터로는 처음 시험을 봐서 어색해서 그렇지, 문제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하던데..."

"저희 레테가 어렵지 않다고요? 하하하 학생 수준에 따라서는 못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90점 정도 받았을 것 같다고 하던데요."

"...... 90점 정도 받았을 거라고 했다고요? 글쎄요.. 중3 학생이 저희 어학원 레테를 90점 넘기 절대 쉽지 않을 텐데요"

"네.."

"여하튼 학생 예상 점수와 실제 받은 점수 차이가 좀 있기는 하네요. 결과를 못 믿으시겠으면 재시험 볼까요?"

"예. 그래야겠네요. 아이와 통화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엄마! 학원하고 통화했어? 나 몇 점 이래?"

"50점 이라는데?"

"머~~ 어!!! 50점?? 헐~~ 말도 안 돼."

"그래? 학원 원장님은 자기들 레테가 다른 시험보다 난이도가 높아서 그런 것 같다는데?"

"난이도가 높았다고? 앞쪽은 엄청 쉽고 뒤쪽 문제들이 좀 까다롭기는 했는데.. 그래도 시간이 있었으면 한두 문제는 더 맞힐 수 있었을 거 같았는데~"

"어쨌든 50점은 아닌 거 같아?"

"말도 안 되지~ 칠십몇 점도 아니고 50점 이라니. 아무리 내가 디지털 시험을 처음본거라도 그렇지. 그 학원 컴퓨터가 고장 난 거 아냐?"

"그럼 재시험 볼까?"

"그래 엄마. 뭐가 이상한 거 같아. 재시험 볼게"

"알았어. 엄마가 학원에 전화해서 재시험 날짜 알아볼게."



"여보세요~"

"아~ 떠덩이 어머님 이시죠?"

"네.. 그런데요. 아이하고 통화해 봤는데 재시험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측의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수요? 떠덩이 시험본 컴퓨터가 뭐가 잘못 됐나요?"

"저.. 그게 아니고 저희가 착각하여 떠덩이 다음에 본 학생의 레테 결과를 떠덩양 점수로 잘못 알고 말씀드렸네요."

"저런. 50점은 다른 아이 점수였군요. 떠덩이는요?"

"떠덩이는 87점입니다!!"

"87점 이요? 어쨌거나 평소보다 잘 못 봤네요."

"떠덩이가 시험방법이 어색하여 실수가 좀 있었던걸 생각하면 90점 이상 충분히 받았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저희 어학원 레테 난이도가 꽤 높은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우수한 실력입니다!! 역시 상위권 학생들은 시험 보고 나면 자기 점수를 정확히 알죠."

"그럼 외고에 진학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혹시 떠덩이 학교 성적은 다 A 인가요?"

"네.. 주요 과목들은요."

"떠덩이 실력이면 상위권인 D외고나 M외고도 입학하는 것은 별문제는 아닐 것 같고, 가서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아.. 네.."

"어머님, 언제 시간이 되시나요? 아이와 함께 내원하셔서 자세한 상담을 진행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좀 바빠서요..."

떠덩이 엄마는 이미 빈정이 상할 때로 상한 상태였던 거죠. 5분 전에는 주제 파악도 못하는 촌뜨기 취급을 하더니 이제 와서.

"아! 저희 생각으로는 떠덩양은 D외고가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어머님 바쁘시면 저희가 먼저 떠덩양 D외고 진학을 위한 세부 커리큘럼을 작성하여 이메일로 보내드릴까요?"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꼭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능한 한 빨리 준비를 시작해야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아이하고 상의 해보구 연락드릴게요."

"네. 저희 어학원을 믿고 맡겨주시면 좋은 성적으로~~"

"아~ 네~"

딸깍.




살다 보니 그동안 학원에 돈 갖다 바친 보람이 있는 날도 있기는 하네요.

"떠덩, 뭐 먹고 싶어?"

"마라탕"

그날 저희가 먹은 마라탕은 달콤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화장실에서 고생은 좀 했습니다만.


대한민국 교육을 걱정하다가 딸자랑으로 끝나버린 용두사미 글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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