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모레 오십. 하지만 처음 할 때 긴장되는 것은 여전하네요. 원래 계획했던 건 아니었는데, 많은 사건이 그렇듯 문제의 시작은 술 이었습니다.
얼마 전 정말 오랬만에 만난 지인들과 소주를 한잔 걸치고 조금 늦게 집에 들어온 여름 끝무렵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술이 살짝 과했던 터라 열이나서 좀 더웠습니다. 잘 때 코를 심하게 골 것은 당연했구요. 그래서 아내가 자고 있는 안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따로 이부자리를 폈습니다. 시원하게 창문 열고 혼자 자려구요. 불을 끄고 누워서 머리맡에 핸드폰과 안경을 벗어두고 잠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발생하였습니다. 분명 얌전하게 잘 벗어 머리맡에 안경을 두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안경을 쓰려고 보니 누가 밟기라도 한 듯 한쪽 다리가 심하게 휘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범인은 고양이 아니면 저, 둘 중 하나인 상황. 어떻게든 비상사태를 해결해 보고자 휘어진 다리를 조심스럽게 원상복구 하려고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하고, 조금씩 힘을 주었습니다. 안경다리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방심은 금물. '툭'. 안경다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안경태와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저런~ 어쩐다.' 계획 없던 곳에 돈들어 가게 생겼습니다. 부러진 안경을 아내가 자고 있는 안방의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두고, 예전에 썼던 안경을 찾았습니다. 아쉽게도 출근하는 데는 지장이 없더군요.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안경은 왜 저렇게 됐데?"
"아..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안경 옆에 고양이수염이 떨어져 있던데, 아무래도 고양이가 안경을 밟고 놀라서 수염이 빠진게 아닐까?"
"고양이가 안경을 밟았다고??"
잠시 생각하던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술 먹고 자다가 안경을 뭉개버린 건 아니고?"
"아니..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고, 일단 오늘 저녁때 고양이를 잡아서 심문해 보자고."
"진실을 알려면 츄르가 좀 필요하겠네"
가장 먼저 노화가 시작되는 신체 기관은 눈이라고 합니다. 빠르면 사십 대 초반, 늦게 시작되는 사람도 사십 대 중후반이면 노안을 겪게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가 될 때도. 삼십 대에서 사십 대가 될 때도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낍니다. 전날 조금 무리하면 다음날 회복이 영 느립니다. 술을 조금 늦게까지 마셨다고, 다음날 힘들어하는 간을 보면 '나이가 들어가는구나'를 느끼곤 하죠. 인버스 하이퍼브릭 코탄젠트 함수 미분같은 것이 암산으로 안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노안이 시작된다는 것은 이전에 느끼던 '나이 듦'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전에 겪었던 조금은 사소한 몸의 노화들이 평소에는 크게 느끼기 어려웠던 것에 반하여,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중 가장 많은 정보 처리를 담당하고 있는 눈의 노화는 즉각적으로 일상적인 삶에 영향을 줍니다. 사십 대 중반의 화창한 토요일 오후.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책을 보려는데, 글자들이 잘 안 보이고 얼굴을 찡그리게 되더군요. 이게 왜 이러나 하다가 책을 눈앞에서 좀 멀리 떨어트렸더니 그때서야 초점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더군요.
증상은 조금씩 심해지더니, 몇 개월이 지나고 나니 책을 읽거나 가까이 있는 것을 볼 때는 기존에 쓰던 안경을 벗어야 초점이 맞았습니다.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할 때는 안경을 벗어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멀리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안경을 다시 쓰려고 찾는데 없어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머리 위에 얹혀있기 일쑤였습니다. 많이 불편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 깻잎김치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는데, 간장을 마신듯 엄청 짜더군요. 한장인줄 알았던 깻잎김치가 세장이었던 차라리 애교입니다.
물론 해결책은 있었습니다. 먼 곳을 볼 때는 위쪽 부분을, 가까운 것을 볼 때는 아래쪽 부분을 통해서 보면 노안으로 인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다초점 렌즈. 주위의 동년배들은 이미 많이들 이 신기술이 적용된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구요. 하지만 왠지 나이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저는 다초점 렌즈 안경 착용을 애써 외면한 채, 가까운 것을 볼 때는 안경을 벗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민방위도 끝나서 설령 전쟁이 난다 해도 불러줄 곳이 없는 나이인데, 그나마 남은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몇년이 흘러온 것 입니다.
그 마지막 자존심이 이번 술 사건으로 인하여 새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툭 던집니다.
"여보. 이렇게 된 김에 다초점 렌즈로 안경을 새로 맞춰봐."
"응? 왜? 고양이가 밟아서 부러트린 안경태만 고치면 되는데."
"......"
"난 아직 돋보기 따위를 쓸 나이는 아니라고!"
"해준다고 할 때 해. 돈쓸데도 많은데 마음 바뀌기 전에"
"네"
하루 연차를 사용하여 남대문 시장 내에 위치한 단골 안경점에 갔습니다. 저의 시력 검사를 마치신 안경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안경 도수로 벌써 10년 가까이 쓰셨네요."
"아..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눈도 더 나빠지셨고, 노안도 심해져서 다초점 안경을 쓰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영화에 나오는 악당 과학자들이 사용하게 생긴 검안 안경에 안경사님께서 권해주시는 도수의 렌즈를 넣고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한결 선명합니다. 기왕 하는 김에 렌즈는 좋은 렌즈를 해야 한다는 아내의 주장덕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있는 외산 다초점 렌즈를 선택하였습니다. 안경태도 요즘 유행한다는 동글동글한 태를 골랐습니다. 젊어 보입니다.
며칠뒤 안경이 완성되었습니다. 다초점 안경은 기존 단초점 안경과는 달라서,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적응하는데 보름 정도 걸린다는 안경사님의 설명입니다. 먼 곳을 볼 때는 렌즈의 위쪽을 활용하고, 가까운 것을 볼 때는 턱을 살짝 내밀고 렌즈의 아래쪽을 통해 보는것이 요령입니다. 안경에 적응 기간 중에는 갑자기 아래쪽을 바라보면 어지러울 수 있으니 계단 내려갈 때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하네요.
보름이 조금 넘었는데도 저는 아직도 적응 중입니다. 뭐랄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해야 배움이 빠르다는 법칙이 다초점 렌즈 안경 적응에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가까운 것을 볼 때는 약간 턱을 내밀어야 하고, 계단을 내려올 때는 약간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곁눈질로 보기보다는 고개 전체를 움직여서 봐야 한다. 요령은 간단해서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몸이 쉽게 받아드리지를 않네요. 어쨌거나 가까운 것을 볼 때 안경을 벗지 않아도 되어서 한결 편하기는 한데, 아직까지도 조금 어지럽습니다.
'몸이 십 할이면 눈이 구할'이라고 했던가요?
예기치 못했던 사건으로 인하여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다초점 안경 첫 경험. 제 계획대로 2075년에 죽는다 치면 앞으로도 오십 년을 더 써야 할 눈. 남은 삶동안 좋은 구경 많이 하면서 살려면 눈 관리에 더 신경써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