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당일
3. 다시 당일
"야, 이 미친... 아오 씨발, 존나 아파!"
아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른쪽 허벅지에 난 구멍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런 상처는 태어나 처음이었고 무언가에 찔린 것도 처음이어서 충격이 매우 컸다.
아들은 바닥을 기어 거실의 TV수납장을 뒤적거렸다.
소독약과 붕대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빨리 119에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아빠는 언제 온다는 거야.
아들은 전화기를 손에 쥐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딸은 오빠의 아픔 따위는 관심 없었다.
이제 오로지 엄마를 막고 강아지의 사체를 사수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이, 이 마귀 같은 년! 결국 네가 정체를 드러내는구나!"
"흥, 까고 있네. 아까는 내가 악귀라며. 왜 같은 년이야? 이제부터 우린 남이야."
딸은 엄마의 오른손에 드라이버를 박은 채로 왼손에 들린 칼을 뺏기 위해 힘을 썼다.
엄마는 오른손은 쓰지도 못한 채 왼손을 들고 있었으나 아픔 탓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딸은 그 모습이 기가 찼다.
이제, 누가 귀신에 씐 사람이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엄마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엄마는 칼을 놓치고 말았다.
드라이버가 박힌 오른손이 너무나 아파왔기 때문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눈물이 줄줄 나왔다.
그제야 악을 쓰며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흥! 이젠 소용없어."
딸은 엄마의 오른손에서 드라이버를 뽑아내고 식칼도 손에 쥐었다.
"아아악!"
엄마는 아까보다 더욱 큰 소리로 절규했다.
그 모습이 딱하기도 했지만 딸은 약해지지 않으려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침부터 엄마와 오빠가 자신을 잡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중요한 건 이들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딸은 엄마에게서 빼앗은 식칼과 주방의 칼집에 꽂힌 다른 과도 두 개를 모두 챙겼다.
버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마트에서 받은 장보기용 봉투에 담아 던져 버렸다.
이제 집안의 흉기는 모두 처리한 건지 다시 상기하며 드라이버를 손에 꼭 쥐었다.
아들은 소독약을 손에 쥐고 상처에 쏟아 붓기를 주저하고 있었고 엄마는 오른손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냥, 119에 전화를 해, 이 미련한 새끼야."
딸은 아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좆 까, 씨발아! 못 걷기만 해 봐, 넌 진짜 뒤질 줄 알아."
저딴 것도 오빠라고, 씨.
도망간 아빠가 널 도와주러 오겠니?
딸은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 뭐 찾아? 칼 찾아?"
"이런 악귀 새끼야!"
엄마는 악다구니를 쓰며 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네가 내 딸을 잡아먹고 이제 우리 가족을 파멸시키는구나!"
딸은 기가 차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가족을 파멸시켰다니.
어쩌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된 걸까.
딸은 눈물이 흘렀다.
조금은 안전해졌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러나 감상을 오래 느낄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
딸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들어 112를 눌렀다.
"긴급 신고 112입니다."
"네, 신고하려고요. 여긴 서울시 쌍계구 일연로, 아악!"
딸은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발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엄마가 두꺼운 프라이팬으로 딸의 발을 후려친 것이다.
발톱이 빠질 것처럼 부어오르고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전화기에선 112 상황실의 경찰이 끊임없이 묻고 있었지만 딸은 들을 수 없었다.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딸은 또다시 달려드는 엄마를 피해 드라이버를 휘둘렀지만 프라이팬의 사정거리가 더 길었다.
가장 아픈 엄지발가락을 치켜들고 발뒤꿈치로 힘껏 발돋움을 하여 현관문 쪽으로 달렸다.
어서 도망가야 했다.
훙, 훙.
프라이팬이 공중에 휘둘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공격은 차마 피하지 못하고 팔에 맞고 말았는데 코끝이 찡할 만큼 매서웠다.
딸은 급하게 바닥을 구르다시피 기어가 식탁 아래로 숨었다.
그때, 화장실 쪽으로 작은 장도리가 보였다.
엄마가 자신을 잡고 오빠에게 망치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던 게 떠올랐다.
"이런, 씨발..."
엄마가 한 손으로 의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나마 드라이버에 찍혀 오른손을 쓰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프라이팬을 놓고 의자를 치우고 있을 때, 딸은 힘껏 내달려 장도리를 잡았다.
"아악! 졸라 아파!"
딸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 발톱에서는 피가 나왔고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딸은 격분하여 망치를 들고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깡! 땅! 훙!
프라이팬에 장도리의 망치가 맞아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딸과 엄마 모두 손목까지 찌릿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에라이, 씨발아!"
아들이 절뚝이며 의자를 휘둘렀다.
딸은 가까스로 머리는 피했지만 어깨를 맞고 말았다.
"이 개년아! 이거, 이거, 파상풍으로 죽을 수도 있대! 다리를 잘라야 될지도 모른다고!"
아들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반바지를 걸치고 오른쪽 허벅지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허벅지에 난 상처에서 피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소독은 하긴 한 걸까.
"잘한다, 아들! 저, 저 사탄 걸린 년을 잡아! 어서!"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딸을 향해 다가왔고 아들은 부서진 의자를 들어 다시 집어던졌다.
딸은 현관문과 등을 맞대어 대치하다 의자를 피하여 뒤로 몸을 젖혔다.
이때, 의자가 워낙 강하게 날아와 뒤로 살짝 뛰게 되었는데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억!"
탕! 소리와 함께 딸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넘어지면서 현관문이 걸쇠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다.
걸쇠는 휘어져 고장 나 버렸고 딸은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엄마와 아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아들이 딸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마구 해대고 엄마는 딸의 몸에 올라타 프라이팬으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딸은 입술을 깨어물고 팔로 프라이팬을 막았다.
머리를 보호해야 했다.
딸은 무자비하게 휘둘러대는 엄마의 프라이팬을 양손으로 잡아 내었다.
엄마가 한 손밖에 쓰지 못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딸은 그 프라이팬으로 엄마의 얼굴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프라이팬은 뒤로 날아가버렸다.
"야! 드라이버 가져와!"
아들이 절뚝거리며 드라이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딸은 올라탄 엄마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장도리가 딸의 등 뒤에 떨어져 매우 아팠지만 이 둘의 눈에 띄지 않았으니 신이 돕고 있었다.
"드라이버 말고 딴 거 찾아볼게, 못 찾겠어!"
"없어, 이 등신아. 그냥 갖고 와! 그걸로 구멍을 뚫어서 죽이면 돼."
딸은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허벅지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엄마를 밀어낼 준비를 했다.
각 상처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나, 둘, 셋!
딸이 힘껏 밀쳐내며 엄마의 목을 잡아 쥐었다.
"찾았다!"
아들이 아픈 다리 때문에 드라이버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딸은 다급히 두 손에 힘을 더 쥐었다.
"이, 이, 미이치... 인, 주우, 겨..."
엄마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아주 이상한 소리로 아들에게 지시했다.
아들이 드라이버를 들고 딸에게 걸어왔다.
발 뒤꿈치를 쿵쿵 찧으며 아픈 다리를 끌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에 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끝인가?
띵동! 띵동!
"안에 무슨 일입니까? 문 좀 열어보세요."
"나, 이반장 아저씨야! 무슨 일이야 도대체?"
쾅쾅쾅!
초인종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고 딸은 감았던 눈을 떴다.
살았다!
"아저씨! 여기에요! 그냥, 문 따버려요!"
딸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고 곧 둔탁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빨리, 땁시다, 빨리!"
"신고 번호 333 다시 9, 지금 진입합니다."
무언가 무거운 물체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현관문을 쾅쾅 울렸다.
엄마도 아들도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지 고민하려고 애썼지만 쾅쾅 울리는 소리가 머리를 때려대었다.
그들은 입을 벌린 채 도망갈 수 있을지 궁리해 보았다.
그러나, 경찰보다 빨리 달릴 자신이 없었다.
탱!
잠시 후, 금속을 때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뜯어져 나가 딸의 왼쪽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바로 문이 열렸다.
"괜찮으십니까?"
"신고받고 출동했습니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딸이 울먹거리며 애원했다.
꿍. 묵직한 소리가 거실 바닥에 울렸다.
아들은 장도리를 떨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