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도대체 무엇이 인간적인 것일까.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란 무엇이길래 우리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이렇게 오랫동안 흔들고 있을까.
기나긴 여행에 대처하기 위해 이 책을 골랐다.
환희로 떠오를 여행길이 어느 순간 익숙해지면 독서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 옛날 학생이던 시절, 단편적인 형식과 현실 해석의 내용 앞에 도망쳤던 책이었다.
여전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끈기를 가지고 3주의 시간을 버텼다.
읽는 도중에 조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러다가도 좋은 구절을 만나면 따로 필기를 해두며 완독을 목표로 하였다.
드디어,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비로소 커다란 환희를 느꼈다.
어려운 독서를 끝내고 책장을 덮을 때, 나를 찾아오는 감격의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독서가 정신세계의 확장을 돕기 때문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하여 나의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발걸음을 완수했다는 보람은 신체를 다듬으며 정진하는 즐거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요가 수련에서 말이지.
그렇지만 정신의 심안이 넓어지는 데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아, 이런 게 바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첫 장을 읽을 때부터, 니체가 책의 제목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으로 지은 사실에 고무되었다.
본질이라고 부르는 이상향의 존재를 닿지 않는 저 너머에서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현실로 가져오겠다는 선언이었으니까.
우리는 누구나 잘 살기 위하여 고뇌한다.
그러나 본질에 대하여 사유하는 사람은 적다.
욕구와 욕망을 통한 고뇌는 수단과 기술의 발달에만 신경 쓸 뿐 진정으로 잘 살기 위한 성찰은 아니다.
그렇다면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철학은 기본적으로 본질이란 것을 형이상학의 태도로 바라본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곳이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장소이므로 닿을 수 없을 뿐, 참된 선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이라는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지할 수 있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현상이 벌어지는 이 세계가 바로, 우리의 삶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이렇게 우리가 본질이란 것을 멀리 두었기에 참된 고뇌에서 멀어진 게 아닐까.
니체는 '과연 어느 세계가 본질에 가깝냐'라고 물으면서 그래도 형이상학의 철학이 주는 참이 선에 가깝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발을 내딛고 선 땅 위에 본질이 있다.
우리가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치는 이 땅 위에 모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므로 그 가치가 땅 위에 서지 못하고 땅 위에 추락한 것이다.
행복은 본질을 추구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라고 본다면, 과연 어느 철학자가 어떤 상태가 행복에 더욱 가까운지 진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생각을 끊임없이 하다 보면,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결론이 진리에 가깝지 않을까.
이러한 고뇌에서 종교가 출발했을 것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고심한 인간이 그 허무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래서 불멸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고 필멸자의 고뇌를 대신 풀어줄 믿음이 탄생했을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본질에 가까울 거라는 믿음으로 여러 가르침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 또한, 인간이 신을 의인화하여 창조한 것일 뿐, 진짜 신의 계시는 아니다.
이러한 점을 니체는 콕 집어, 종교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허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천민으로 빗대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니체의 비난이 아니라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과 의지이다.
본질을 찾으려 애쓰는 삶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며 신념과 위지로도 정답을 찾기 어렵다.
그러므로, 과정을 지켜본다.
과정이야말로 본질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삶의 지평선 위에 수없이 선택하며 수많은 결과를 낸다. 그러면서 과정도 발전한다.
점점 고등의 수준을 갖추게 되며 삶의 본질에 대하여 가까워진다.
바로,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을 찾아가는 것이다.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는 니체가 콕 집어 말한 자유정신과 위계질서라는 철도를 지나쳐야 한다.
자유정신은 반항이나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의문이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그저 당연한 것은 없으니 왜 그러한가에 대하여 묻고 생각하는 일이 자유정신이다.
그럼, 위계질서는 무엇인가.
단계가 실재하고 규범이 존재하는 질서이며 우리가 사는 사회를 말한다.
그것은 제도이며 법이고 범칙이다.
자,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 더욱 행복한가.
무엇이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주며 삶의 본질에 가깝도록 돕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며,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아야 나에게 맞는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은 위계질서가 바로 선 상태에서 더욱 행복을 느낀다.
자유정신의 질문은 훌륭한 태도이지만 질문만 무성하고 대책이 없는 상태는 혼돈일 뿐이다. 그리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질서가 존재하는 제도 안에서 안락함을 더욱 느끼는 것 같다.
토론을 하며 질문을 주고받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선택하였으며,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 그러하였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가.
니체는 자유와 위계, 정신과 질서를 열심히 설명하며 문화와 인간의 예술적 정신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동물적인 감각과 본능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제도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것은 알 수 없는 위협에서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도화된 규범은 편리하며 누구나 차례를 지키는 질서를 가져다준다.
이것은 효율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하다.
그렇다면, 자유정신은 현실에서 크게 쓸모가 없는 걸까.
아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본질로 다가서는 자세는 자유정신이 추구하는 질문과 의문이 바탕되어야 한다.
그럼, 이분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본능에 가까운 자유정신을 이성이라는 제도로 우리는 스스로 묶을 수 있다.
이 경계를 잘 지키는 것, 그것은 행복의 지름길이다.
자, 도덕이라는 가치를 보자.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감정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나누어 적용하며 살고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둘을 섞어 인지하고 판단한다.
도덕적 감정과 판단은 감각의 전이를 타고 타인과 함께하는 삶에 바로 적용한다.
나는 처음에 도덕적인 감정과 판단이 잘 구분되지 않았는데,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나쁘다고 느끼지만 집단에서는 도덕적으로 옳다고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집단이 말하는 도덕이란 공리주의에 가깝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개인일 때와 집단의 일원일 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데, 여기에 공감이라는 유대감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나는 공감이라는 감정이 개인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 직장에서 여러 번 겪은 바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는 판단도 타인의 감정을 헤아려 공감하게 되면 끝내 판단도 변한다.
그러므로 감각의 전이는 도덕적인 판단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 개인이 원래 가졌던 감정까지 변하게 만든다.
어쩌면 페르소나는 그러한 전이에서 탄생한 가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데 묶이길 바라면서도 자유를 꿈꾸는 이상한 족속이니까.
정의를 죽여 정의를 얻는다는 니체의 말도 이상할 게 없다.
진리의 말살은 사실 본질이라는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모순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은 종교와 문화를 넘나들며 표현하는데, 힌두교의 시바신은 창조를 위하여 파괴를 하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고 주인공에게 말한다.
진리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장소에 존재하는 본질을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으니,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에야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니체가 이것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좋을까.
참된 선을 찾는 여정이 과정 자체로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 되려면 무언가 부족하지 않나.
파괴한 정의, 말살한 진리를 바라보는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위로해야 할까.
우리를 그 여정에서 벗어나지 않게 격려하는 일이 추가되어야 부족하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실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에 가깝고 감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소멸한다.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불안과 공허함이다.
니체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의지를 강조했을 것이다.
종교를 다시 한번 보자.
애초에 존재자'라는 신을 가정한 것은 진리를 사유하고 추론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신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우리의 주체적인 힘을 스스로 내어주면서까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의 세계가 있다고 한들 그 역시 날조된 세계에 불과하지 않을까.
갖가지 주체와 실체들이 뒤섞여 사물을 이루고 이성과 감각으로 점철된 날조된 세상.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을 아무리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여도 축적된 경험이 아닌 선험적으로 이미 겪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지점.
어쩌면 우리가 예술적 기질을 태생적으로 가진 존재여서 그처럼 아름답게 날조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죽어버린 진리를 위한 진정한 위로는 선악을 넘어 도덕이라는 단어에 논리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일이다.
참된 선이라는 말이나 행복이라는 말을 우리가 입에 담을수록 도덕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말이다.
게다가 도덕은 인간적인 삶과 결부되어 있으니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보는 인간적인 삶이란 우리가 삶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주체로서 행위하고, 객체로서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심하는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거기에 흔히 말하는 도덕이나 양심, 신, 계시 등의 날조된 억측에 기대지 말고 내가 딛고 선 땅 위에서 인지하는 사물을 제대로 보려는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의 말마따나 행위에 주체를 덧붙이는 공허한 문법적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힘에 태생적으로 주어진 스스로 위로하는 의지를 가지고 내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언어가 주는 정신 확장과 삶의 성찰에 대하여 강하게 이끌렸다.
나의 삶은 나를 이루는 언어가 만든다.
언어는 정신이며 인지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실체에 가깝다.
언어는 날조된 것이 아닌 현실 하는 세계에 존재하면서도 저 너머의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감각이다.
따라서, 나의 정신 의식을 넓히기 위하여 앞으로도 많이 읽고 쓸 것이다.
그리하면, 인간인 내가 인간적인 나로 발돋움하는 바탕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