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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거북 Dec 18. 2020

자가격리 앱이 실행중입니다.

코로나로 올해 수영을 계속 쉬다가 재등록한 지 딱 한 달 되었다. 수영하는 시간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코로나로 회원이 많이 줄어서 오전 6시 상급반에는 많이 와야 6명이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수영장에 확진자가 발생했다, 나는 확진자와 이용 시간대도 반도 다르지만 샤워실과 탈의실을 공유하는 수영장 오전 이용자였다. 확진자 발생 날 오후에 증상이 있으면 검사를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이틀 후 다시 온 문자에는 ‘증상이 없어도 유치원, 학교, 학원, 의료기관 등에서 근무하시는 분은 필히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라는 문구가 있었고 교사인 나는 바로 검사를 받았다. 마음 조리며 결과를 기다렸는데 다음 날 아침 10시에 ‘음성’ 판정 문자가 왔다. 천만다행이었다.      

이용시간대도 달랐고, 수영장 발 추가 확진자는 밀접접촉자 한 명에 그쳤으며, 음성 결과가 나왔으니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자가격리 대상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말 중 검사와 결과 통보가 이루어져서 무사히 출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주 화요일 오후에 ‘00 수영장 발’ 확진자가 갑자기 9명으로 늘었다. 저번 주 오전에 수영장을 이용한 여자 회원들에게 음성 결과와 상관없이 자가격리 통보가 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제발 나는 아니기를 빌었다. 나는 중3 담임이고, 11월 한 달 내내 중3은 등교 수업이었다. 수업이 22시수였고, 이번 주 공강 시간은 고입 관련 학부모 상담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내가 자가격리가 되면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울집 초딩 똥꼬 1호(초5), 똥꼬 2호(초3)는 어떻게 되는 걸까? 1학기에 주 1회 등교를 하다가 2학기 주 3회 등교를 하면서 오랜만에 반 친구 전체를 만나고 신나서 학교 가던 중이었다.


혹시나 재택근무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저녁에 깜깜한 교무실에 가서 노트북과 고입상담자료, 수업자료를 챙겨 왔다. 밤 10시가 되었지만 보건소에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나는 시간대가 달라서, 이용 날짜가 하루밖에 겹치지 않아서, 자가격리까지는 아닌가 보다 하고 희망을 품었다.

올 게 오고야 말았다.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가 떴다.      

나는 자가격리 대상자가 되었다.  

    

힘없이 ‘네. 네.’만 하고 있다가 늦게 연락드려서 죄송하다는 보건소 직원의 말에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으세요.‘ 했더니 10초쯤 침묵이 흘렀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여보세요? 여보세요?'했더니 수화기 저편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보건소 직원이 '내일 직원이 갈 거예요.'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나와 같이 안절부절 연락을 기다리던 보건 선생님께 이 소식을 알리고, 3학년 부장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인근 수영장발 코로나 소식에 퇴근 후에도 쉴 새 없이 교직원 카톡에 상황을 전하며 00수영장 관련 학생을 파악하느라 정신없던 보건 선생님은 '학생'이 아닌 '교사'의 자가격리 소식을 듣게 되었다.

3학년 부장님은 안 그래도 한 달 전 갑자기 병가 들어가신 3학년 담임 선생님 공백을 메우느라 고군분투 중이셨는데 부장님께 나까지 못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해야 했다.  

   

남편은 일을 쉴 수가 없어서 짐을 싸서 시댁으로 갔다. 의무는 아니었지만 그게 나도, 남편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가족끼리 거리두기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아이들과 한 집에 살면서 거리두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내가 무증상 감염자일 수도 있고, 내가 아이들에게 옮겨서 더 오랜 기간 동안 아이들이 사회에서 격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이 와중에 확진자와 동선이 겹치기 이틀 전에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입원 중인 아빠 병문안을 다녀온 것과, 우리 반 아이 실기 시험이 끝난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빠한테 코로나를 옮기거나, 우리 반 아이가 나 때문에 실기 시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이 생겼다면 나는 이 글을 세상에 꺼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안방에서 잤었는데 공부방에 손님 이불을 펼쳤다. 집에만 오면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해방감을 느꼈는데 집에서도 마스크를 썼다. 내 세면도구를 챙겨 안 쓰는 화장실에 갖다 놓았다.

아이들은 갑자기 내일 학교에 못 나가게 된 것에, 엄마 살을 비비며 잘 수 없게 된 것에, 슬퍼했다. 둘째가 '엄마, 엄마가 그날 수영장에 안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말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공부방에 나 혼자 누워서 낯선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를 빼고는 처음으로 혼자 잤다. 애들이랑 따로 떨어져 자면 잘 잘 줄 알았는데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이 민폐를 끼치고 학교에 어떻게 복귀하지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 처음에는 복귀 날 교무실, 교실을 상상하며 괴로웠는데, 격리 후반으로 갈수록 내가 확진이 되어 학교에 선별진료소가 세워지고 학교가 폐쇄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Day1

잠을 못 잤다고 얘기했더니 똥꼬 2호는 '거봐. 엄마도 우리가 필요하지? 오늘 밤도 어땠는지 내일 말해줘.' 하며 좋아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애들 담임 선생님께 전화해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가정학습 신청서를 냈다. 습관적으로 '아니오'를 체크하던 자가진단 앱 3번 질문 '학생 본인 또는 동거인이 방역당국에 의해 현재 자가격리가 이루어지고 있나요?' 에 '예'를 체크했다.      

마스크 쓰고 일회용 장갑을 끼고 아이들이 먹을 밥은 식탁에, 내가 먹을 아침은 레고가 들어있는 정리상자 위에 차렸다.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밥맛이 없었다. 컴퓨터 책상에는 우리 집 컴퓨터와 재택용 노트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밥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오후에 자가격리 통지서와 마스크, 쓰레기봉투, 소독제, 스트레칭 밴드 등이 담긴 쇼핑백을 보건소 직원이 건네주고 갔다. 수영장 발 자가격리자가 240명이라고 했다. 자가격리 앱을 깔았다. 폰을 열 때마다 '자가격리 앱이 실행중입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하루에 두 번, 10시와 8시에 증상이 있는지, 체온이 몇 도인지 체크해서 앱으로 보고해야 했고, 매일 전담공무원한테 전화가 왔다. 딱딱하게 증상만 체크할 줄 알았는데 '자가격리자의 정신 건강 케어'도 매뉴얼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분과 통화하는 시간은 격리생활 중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시간이었다. '1호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잘 알지요. 애들이 어린데 혼자 케어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시댁으로 보내는 게 어때요? 아이고, 중3 담임이구나.' 이런 맞장구에 나는 신이 나서 종알거렸다.

     


Day2

학교의 모든 공지사항은 부담임 선생님이 아닌 나에게 오고 있었기 때문에 조종례 사항을 정리해서 부담임 선생님께 전달했다. 교무수첩에 적어 교실에 들어가서 말하면 일도 아닌데, 글로 다 정리하려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동네 확진자가 많아져서인지 가정학습을 내겠다는 아이도, 몸이 안 좋아서 집에서 쉬고 싶다는 아이도 많았다. 조례 전달사항을 정리하고 출결 관련 전화를 받다 보니 10시가 훌쩍 넘었다.


메신저에는 영어과 보강과 관련한 쪽지가 계속 오갔다. 저번 주에 영어과 선생님 한 분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한 주간 영어과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보강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자가격리자' 때문에 또 보강을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교무부장님이 교과에서 보강하는 것이 한계에 부딪혀서 다른 교과 선생님들께도 보강을 부탁드린다고 이해해 달라는 쪽지를 전교사에게 보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똥꼬 2호는 너무 심심한지 안 하던 짓을 했다. 물감과 물통을 꺼내서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물러가라' 간절한 기도가 작품이 되었다.

     

둘째의 작품: 심심함과 간절함이 작품이 되었다.

저녁에 똥꼬 2호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같은 반 친구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내가 자가격리 중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애가 저번 주에 똥꼬 2호와 놀았는데 2호 엄마가 확진자랑 밀접접촉자라고 해서 오늘 울 집 애들 학원도 안 보냈어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선생님도 답을 할 수 없어서 먼저 나한테 전화하신 거였다. 애써 버티고 있던 마음 한 켠이 무너졌다. 담임 선생님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말씀드렸고, 나는 괜찮지만 아이들이 이 일로 낙인이 찍히거나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다. 선생님이 2호 친구 엄마가 생각하고 있던, 과도하게 부풀어진 부분은 바로 잡아 주셨고 그 엄마도 선생님과 통화 후 불안한 마음이 많이 진정되시는 것 같았다고 전달해주셨다. 너무 감사했다.

우리 애들은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나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중학교에서 일한다. 문제가 된 수영장도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그래서 아마 내가 수영장 때문에 격리된 걸 알았던 것 같다. 온 동네가 벌써 알고 있나 보다.  

   


Day3

시에서 보내주는 자가격리자 구호품이 왔다. 쌀, 햇반, 김, 참치캔, 메추리알, 라면까지 종합 선물세트였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심심해서인지 하루 종일 싸우던 애들은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간 것처럼 신이 났다. 라면이 왔는데 라면을 안 먹는 건 예의가 아니란다. 똥꼬 1호가 파까지 가위로 잘라 넣어 끓여준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자가 격리자 구호물품: 라면 부자가 되었다.

예정되어있던 고입 학부모 상담을 집에서 전화로 계속 진행했다. 상담을 신청하지 않은 분에게도 전화를 한 번씩 다 했다. 하루 종일 고시원 같은 방에서 전화만 들고 있으니, 머리도 아프고 전화기 든 왼쪽 팔이 너무 아팠다.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남편이 놓고 간 버즈를 연결해 쓰라고 했다. 야호! 신세계였다.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아 2/3 등교가 1/3 등교로 바뀌었다. 제발 다음 주는 3학년 등교가 아니기를 바랬다. 선생님들이 더 이상 보강을 들어가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1/3으로 바뀌어도 고입 일정 때문에 다음 주도 그대로 3학년 등교로 학사일정이 결정되었다. 덜 미안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보다.     


엄마들은 아마 다 눈치를 채셨을 것 같다. 첫날은 몸이 안 좋아서 안 왔나 보다 했던 담임이 3일이 지나도 학교에 안 나가고, 상담 전화 목소리는 또 쌩쌩하고, 수영장 코로나 관련 문자와 알림이 폭주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 한 분도 '격리'에 '격'자도, '수영장'에 '수'자도 꺼내지 않았다. 선생님 얼른 쾌차하시라는 말만 들었다. 묻지 않아 주신 분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신 분도 모두 고마웠다.


보건 선생님도 매일 한 번씩 전화하셨다. '코로나 자가격리 교직원 건강상태를 매일 확인해야 하나 보다'는 생각은 사실 나중에 했고 전혀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전화였다. 학교 못 나가고 집에 있으니 가시 방석이라고,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힘드신데 일을 가중시켜드려 죄송하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때에요. 학교 걱정은 하지 마세요.'하셨다. 가시 방석 어떤 건지 알겠다고 하시면서 농담으로 보건 샘 자신도 압정 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인지 너무 와닿아서 숙연해졌다. 항상 웃고 계셔서 잊고 있었는데 올 한 해를 매일 긴장 속에 지내면서 어깨에 진 짐이 얼마나 무거우실까.

여전한 하이톤으로 전달사항을 재빨리 전달하는 3학년 부장님, 비난이나 원망이 추가되지 않은 여전한 목소리가 나를 안심시킨다.

저번 주에 아버지 상을 치르고 와서 복귀하자마자 나 때문에 수업 보강이 5시간이나 잡힌 영어 선생님은 보강하는 거 하나도 안 힘들다고, 건강하게 잘 있다가 만나자고 말해주셨다. 너무 죄송하고 감사했다.

갑자기 임시 담임으로 투입된 우리 반 부담임 선생님은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 챙기느라 힘드셨을 텐데 종례를 마치고 나면 반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시며 오히려 나에게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하고 인사해주셨다.

내 몸보다 마음이 걱정이라 이틀 연속 베프 은지한테 전화가 왔다.

똥꼬 2호는 뜬금없이 방문을 빼꼼 열고 엄마 파이팅을 외치고 도망간다. 내가 '어제도 잠이 잘 안 왔어.' 할 때마다 너무 좋아한다. 코로나고 뭐고 안아보자고 좀비 시늉하며 따라붙는 첫째 때문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애들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가까이 오지 마.'가 되었는데, 이 말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들이다.

격리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택배로 배달된 친정엄마표 반찬과 뜨끈한 냄비채로 집 앞에 놓인 시어머니표 김치찌개, 고기, 두부, 계란으로 냉장고가 꽉꽉 들어찼다.     


나는 사랑받고, 보호받는다.     


작년에도, 올해도 가지가지 사고를 치며 학교를 흔들어놓은 나는, (작년의 사고는 수위가 너무 높아 퇴직 때 즈음에나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그래도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철없는 딸, 다이나믹한 며느리여서 부모님들 걱정도 많이 끼치지만, 그래도 사랑받는다.

이럴 때가 아니면 무디고 메마른 나는 잘 모른다.  

    


Day 4

원서 철인데 담임이 없으니 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고입 배정 희망 순위를 아이들이 학급 밴드에 댓글로 사진 찍어 올리면 내가 집에서 점검하고 전화하는 식으로 상담을 진행했다.

보강 들어가는 영어과 선생님들께 미안해서 다 다음 주 원격 수업용 영상을 그분들 몫까지 만들었다.      

아무리 미안해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집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미안함을 덜고 싶어 나를 몰아붙이니 저녁이 되면 너무 피곤했다.


밤마다 남편과 화상통화를 했다. 이산가족이 된 것 같다. 하루 종일 잘 버티다가 작고 네모난 화면 안에 들어가 있는 남편을 보니 그때서야 긴장이 풀리면서 울컥했다.

항상 며느리, 손주들과 세트로 오던 아들을 오랜만에 독차지하신 어머님 아버님은 “나도 아들이랑 잔다.” 하고 좋아하셨다. 남편도 시댁 작은 방에서 격리에 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아들 밥을 챙기고 얼굴을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좋으셨던 것 같다. 부부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아픈 것도 아닌데 다 큰 아들을 다시 키워볼 수 있는 경험을 내가 선물했다. 하하하. 남편 맡기고? 죄송하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꼭 껴안고 싶다. 자가격리 끝나면 하고 싶은 일 10개를 쓰라고 했더니 똥꼬 2호가 '온 가족 모여서 밥 먹기'라고 썼다.     

똥꼬 2호는 뜬금없이 어릴 때 읽던 '깊은 밤 부엌에서'라는 책을 방문 앞에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했다. 격리 끝나고 읽어준다고 하니 그럼 폰으로 녹음해서 들려달라고 했다. 엄마 홀로그램이라도 잘 때 옆에 있었으면 좋겠단다. 격리가 끝나면 1. 복희탕의 비밀, 2. 깊은 밤 부엌에서, 3. 엄마사용법 이렇게 세 책을 읽어주기로 약속했다.      

둘 사이에 끼어서  '영어 숙제했니? 가지고 와봐.' 하고 잔소리하던 엄마는 ’할 거 다 했어?‘ 하고 멀리서 묻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도, 아이들도 잔소리로부터 해방된 시간이었다.

반죽해 둔 수제비를 장갑 끼고 뜯을 수가 없어 못 먹고 버려야 하나 보다 했는데 아이들이 반죽을 뜯어 넣어 한 상 차려주었다.


공부방에 피아노가 있어서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피아노가 갑자기 너무 치고 싶어 졌다. 장갑 끼고 쳐볼까?

     

애들하고 떨어져 자면 개운할 줄 알았는데 나는 혼자 있으면 밤에 폰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유튜브 보며 스트레칭하겠다고 손에 든 폰은 스트레칭이 끝나도 계속 손에 들려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늦어도 11시에는 잠들어 5시에 일어나던 생활 리듬이 깨졌다. 내 잠의 방해꾼인 줄 알았던 우리 아이들이 사실은 나를 재우고 있었다. 반면 아이들은 둘이 자면서 '말 그만하고 얼른 자.' 호통치는 엄마가 없어서 밤늦도록 재잘재잘 수련회가 따로 없었다. 재잘재잘이 수면제였던 것을 격리 전에는 몰랐다.      



Day 8

격리가 시작된 날은 수영장을 마지막으로 간지 이미 5일이 지난 후여서, 나의 실 격리기간은 2주가 아니라 9일이었다.

내일 점심 12시가 격리 해제이고, 오늘이 해제 전 검사 날이다. 10시에서 11시까지 꿀 같은 한 시간이 주어졌다. 집을 나서면서 '보건소로 출발', 보건소에 도착해서 '보건소 도착', 집으로 돌아오며 '보건소에서 출발', 집에 도착해서 '집에 도착' 앱으로 보고를 하기로 했다. 아. 오랜만에 만난 햇빛이 따사롭고 고소하다. 두부를 먹어야 할 것 같다. 하하. 보건소 앞 대기 의자에 앉아 발을 쭉 펴고 꼼지락꼼지락 했다. 해를 온몸 구석구석 담아가고 싶었다. 내일은 아이들과 같이 이 해를 보고 싶다. 그럴 수 있겠지?

처음에 검사받을 때는 음성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번엔 무서웠다. 격리 해제 전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는 경우가 꽤 있다고 들었다. 괜히 열이 나는 거 같고, 목이 간질간질한 거 같고,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었다. 맛과 냄새가 잘 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작은 컨테이너에서 하루 종일 검사하는 의료인들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이번엔 검사받고 나오는 길에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인사했다.      

격리 해제 전 검사: 집탈출 후 맛본 고숩던 햇빛

Day 9

아침부터 폰을 들고 심장이 콩콩 뛰었다. 카톡창으로 00시로 시작하는 알림이 떴다. 음성이었다. 할렐루야! 갑자기 입맛이 돌았다.

담임 반 아이들 고입원서 작업을 해야 해서 준비하고 있다가 12시 땡 하고 바로 학교로 출발했다. 똥꼬 1호, 2호랑 우당탕탕 뛰어나와 해를 만끽했다. 해만 봐도 설렌다.      

어떻게 교무실에 다시 들어가지, 어떻게 교실에 다시 들어가지?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상상이었는데 막상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일을 처리해야 해서 긴장할 새도 없었다.

사실 나는 당분간 점심도 학교에서 안 먹고, 물도 텀블러에 따로 싸다닐 생각이었다. 아무리 음성이어도 갓 격리 해제된 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어요.',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선생님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쌤, 뭐야뭐야! 잘 쉬었어?' 장난기 가득 째려보는 눈에 반가움이 묻어 있다. 혼날 준비하고 고개 푹 숙이고 있었는데 누가 쓰담 쓰담해주는 것 같다.

동료 교사들이 해주는 말과는 별개로 등교 수업에, 원서 준비에 너무 바빠서 혼이 나가 있는 선생님들을 눈 앞에서 보니 더 미안했다.    

 

그래도 교실 문 앞에서는 떨렸다. 갑자기 점심시간에 불쑥 나타난 담임을 보고 당황스러워할 줄 알았던 우리 반 아이들은 손뼉치며 환호해주었다. 경계가 없는 환대였다. 제일 앞에 앉은 개구쟁이가 '선생님 코로나 걸렸어요?' 하자 애들이 다 웃었고, 저 뒤에 있던 우리 반 까불이가 '자가격리되셨겠지.' 하는 말에 애들이 한 번 더 웃었다. 나도 긴장이 확 풀렸다. '선생님 어디 갔었어요? 너무 보고싶었짜나요.' 애교를 떨다가 수업이 시작되자 바로 엎어져 자는 아이도 오늘은 귀엽기만 하다.      


나를 위험한 바이러스로 생각하고 피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신기하고 고마웠다.

일할 수 있어서 기뻤다.   

   

공용 정수기를 안 쓰려고 집에서 물까지 넣어 가져 간 텀블러는 이날 꺼내지도 않았고, 일주일은 도시락을 싸다니거나 점심을 건너뛰려고 했는데 나는 다음날부터 급식실 가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절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고고하고 싶었던 나는 이렇게 또 신세를 지고 말랑말랑해졌다.     

 

저녁에 남편이 치킨을 들고 집으로 복귀했다. 똥꼬 2호의 소원대로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나는 내 식기를 따로 구분해서 쓰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과 남편을 와락 껴안을 수 있고, 원래 쓰던 화장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베란다에 쌓여있던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를 버리자 집이 한 평은 더 넓어진 것 같다. 아직도 접시를 꺼낼 때 멈칫하고 마스크 없는 입이 어색했다.


내가 잠재적 바이러스라는 생각에서 헤어 나오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잘 시간도 안되었는데 둘째가 부지런을 떨며 공부방에 있던 내 베개와 이불을 자기 옆으로 옮겨놓았다.      


감금당한 시간은 사실 보호받는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부터, 더 큰 비난과 더 오랜 격리로부터.      

나도 충분히 확진자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가격리자의 삶이 이러한데 확진자는 얼마나 힘들까 감히 상상도 안된다.

      

라디오 공익방송에서 '확진의 기로에서 확신으로 스스로 멈춰준 사람들'이라는 카피를 들었다. 운전하다가 한 단어씩 천천히 곱씹어 따라 읽었다. 누구인지 모를 수많은 분들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비록 나는 스스로 멈추지 못했지만 말이다.

     

코로나 때문에 일상이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상은 유지되고 있었다. 멈춰준 사람들, 밤낮없이 일하는 보건소 직원들과 의료진들, 어김없이 집 앞까지 배달해주는 택배기사님들, 자가격리자의 빈자리를 기꺼이 채워준 사람들, 다시 품어준 사람들 덕분이다. 격리가 되고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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