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러버
노트에 메모 좀 해봤다, 하는 분들은 아마 '몰스킨(Moleskine)'이라는 이탈리아 노트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생각이 바로 안 나시는 독자들을 위한 부연 설명을 하자면, 굉장히 단단하고 고급져 보이는 하드 커버에 책갈피도 있고, 고무줄 밴드도 달려있다. 색상은 검정/빨강/초록색이 주로 팔리고(스벅 다이어리와 콜라보하는 그 노트!) 무지에 글자 쓰기와 스케치를 함께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애용한다. 크기는 소/중/대(내가 구분하기 편한 명칭)로 다양한 편인데, 노트 치고는 가격이 센 편이다. 보통 29,000원에서 50,000원 대까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아니면 창의력 있는 아이디어 뱅크가 되기 위해, 아니면 이 세상에 위대한 업적을 남길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메모의 중요성을 익히 들어왔던 터.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게 됐다. 워낙 생각이 많은 학생이었고, 일기 또는 독후감이나 느낀 점 쓰기를 좋아해서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질 좋은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적다 보면 마음이 정돈되고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게 좋았다.
나의 첫 몰스킨 노트는 10년 전쯤에 산 검은색 무지였다. 이곳에 좋아하는 시, 노래 가사, 플레이리스트, 책 구절, 영화 명대사, 떠오른 아이디어 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모았다. 이런 보석들을 시간이 흐른 뒤에 들춰보는 기쁨과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에 계속 메모를 한다. 두 번째 몰스킨 노트는 갑자기 퇴사하게 된 사람이 선물로 준 꽤 큰 사이즈의 빨간색 무지. 여기에는 고궁, 영화, 미술관, 사진전의 입장권을 컬렉션처럼 모았다.
몰스킨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빈센트 반고흐,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등 유명인들이 즐겨 썼던 역사적인 노트라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장난이었고 사실과 무관한 마케팅이었다!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몰스킨은 1990년대에 생긴 이탈리아 회사'고, '심지어 Made in china 브랜드이다. 심지어 원판 몰스킨의 기원은 프랑스이다.' 와.. 나 제대로 낚였었구나.
다만, '몰스킨'이라는 19~20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사용되던 노트의 한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땐 겉표지가 주로 양가죽 재질이었는데, 나중에 비용상의 문제로 기름 먹인 면 재질의 몰스킨 원단이 사용돼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무튼 종이가 좀 얇은 거 빼고는 펜의 잉크도 잘 먹는 편이고, 무엇보다 하드커버라 노트 형태가 변하지 않고 메모를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몰스킨만의 특장점. 그래서 이후에 몰스킨의 노트 모양을 따라한 이름 없는 브랜드들도 많이 생겼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몰스킨은 지식인의 사치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필자도 아이패드를 더 자주 쓴다. 자주 쓰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매일 가지고 다닌다. 이제는 메모뿐 아니라 블루투스 키보드로 노트앱을 활용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실 몰스킨을 포함한 종이 노트는 안 쓴 지 오래다. 위클리 플래너를 통해 한 주간의 계획을 짜고 오늘 할 일을 적고, 주간 목표/ 월간 목표를 세우고 평가도 해보는데 이것도 요즘은 아이펜슬을 이용해 아이패드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 대학생들은 노트 대신 아이패드에 필기를 하는데, '종이질감 필름'이란 것을 사서 붙인단다. 이유는, 디지털 기기를 쓰지만 종이에 사각사각 필기하는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라나. 아날로그 감성도 느끼고 필기감도 좋게 하고 일석이조를 노리는 똑똑한 학생들이다. '메탈 펜촉'까지 함께 장만하면 더 잘 써진다고. 디지털 유목민인 내가 본받고 싶은, 진정한 디지털 러버 세대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