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집 앞에서》

[1편] 그날, 카페에서

by 라이브러리 파파

그는 늘 앉던 창가 자리였다.
따뜻한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고, 창밖 노을은 천천히 지고 있었다.


오후 네 시 반.
카페의 음악은 적당히 조용했고,
종이컵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도도 느려지는 시간.

Leonardo_Phoenix_10_A_cozy_caf_in_Canberra_during_golden_hour_0.jpg 캔버라 쇼핑센터 내 코코블랙 카페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손을 깍지 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어떤 모습일까.’

이 생각이 또다시 마음속을 휘감았다.
익숙한 풍경인데,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노을이 졌다.
그녀는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고,
머리를 묶은 고무줄이 느슨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시선이 가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커피를 저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히 종이에 적었다.

“그 책, 저도 좋아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대화, 조금 나눌 수 있을까요?”

무심한 척, 공손한 척.
그러나 마음은 뛰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그를 향했고,
짧은 정적 끝에,
입꼬리가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히 올라갔다.

“네. 좋아요.”

그건 단순한 시작이 아니었다.

그의 세계가 달라지는 첫 문장이었다.

그 후로 그들은 몇 번 더 마주쳤다.
정말 우연처럼 시작된 반복이었다.

어느 날은,
그녀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창가네요.”
“그 자리에 앉으실 줄 알고 기다렸죠.”

둘은 각자의 책을 펼쳤지만,
페이지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날이었지만,
그 침묵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의 전공 이야기,
좋아하는 영화,
싫어하는 음식.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심리학이요. 아, 아직 학부긴 한데요.”
“아, 그러시군요. 저는 경영학이에요. 이제 마지막 학기고요.”

처음엔 존댓말을 썼다.
말끝마다 웃었고,
괜히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짧은 대화가 점점 길어졌고,
말투는 어느새 서로를 닮아갔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혹시… 말 놓을까요?”

그는 잠깐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나도 그 말하려던 참이었어.”

말이 편해지자,
표정도 조금 더 편해졌다.
그녀는 자주 눈을 맞췄고,
그는 눈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그 계절,
캔버라의 오후는 유난히 따뜻했다.
햇살이 길게 늘어졌고,
둘은 같은 속도로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인턴십 때문에 퍼스로 가야 해.”

짧은 말 한 줄이,
그의 가슴에 길게 스며들었다.

공항에서,
그녀는 마지막까지 웃었다.
“기다려줄 거야?”
“당연하지. 매일 연락할 거니까 너무 피곤해하지 말고.”
“그럼… 하루에 한 번만.”
“안 돼. 너 자는 동안에도 문자 보낼 거야.”

비행기 이륙 직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이랬다.

“오늘도 고마워.”
“나, 잘 다녀올게.”
“우리 오래오래 얘기하자.”

퍼스와 캔버라는 생각보다 멀었다.


하늘길로 몇 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마음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넓고 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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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도 크게 없었지만,

생활의 리듬이 엇갈렸다.
그녀는 이른 출근과 바쁜 회의 속에 있었고,
그는 오후 강의가 끝나면 빈 방 안에 혼자 남아 있었다.

가장 보고 싶은 순간에
전화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괜히 끊은 날도 있었다.

서로의 하루를 묻고 싶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얼굴 앞에서는
조용히 “얼른 쉬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문자 알림 하나에 가슴이 뛰다가,
몇 시간 동안 답이 없으면
괜히 내가 뭔가 잘못했나 불안해졌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듣는 일이
어느새 버거운 일이 되어갈 무렵,
둘은 동시에 같은 문장을 썼다.

“혹시, 우리 괜찮은 거 맞지?”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지는 걸까.

그리워할수록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고,
걱정한다는 말이
상대의 피로를 더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이해하려 했다.

사랑은 늘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복잡함 속에서도
그녀는 매일 마지막 문장에 썼다.

“오늘도 고마워.”

그리고 그는,
그 말 하나에 또 하루를 버텼다.

그녀가 퍼스에서 지내는 6개월 동안
둘은 싸우지 않았지만,
자주 그리워했다.

그리고,
캔버라에서 다시 마주한 날.

그녀는
예전과 똑같은 자리,
창가에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야.”

그날의 햇살도,
카페의 음악도,
변한 것 하나 없었다.

다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 오래 머물렀을 뿐.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2편 예고 –《다시, 같은 자리에서》

그녀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엔 6개월의 계절이 흘렀고,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이 쌓여 있었다.

재회의 첫 눈빛은 익숙했고,
첫 말은 낯설었다.
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무엇부터 묻고 안아야 할지
서로는 잠시 망설였다.

그날의 커피는 조용했고,
말은 짧았지만 눈빛은 길었다.
시간이 멀어지게 한 것은 거리였지만,
다시 가깝게 만든 건…
그리움의 온도였다.


《해가 지는 집 앞에서》
2편, 《다시, 같은 자리에서》


그들이 다시 마주 앉은 날,
말보다 먼저 움직인 건 마음이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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