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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

프롤로그 – 평화의 끝에서

by 라이브러리 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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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황성의 마지막 가로등이 꺼질 때, 그 누구도 그것이 한 시대의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시는 천천히 붕괴되었고 시스템은 신호를 끊었으며, 백두령 방어망은 침묵으로 전환되며 저항을 멈췄다.

레벨과 코인으로 모든 것이 분류되던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고통은 데이터 로그조차 남지 않았다.

프리덤이 없는 자는 말할 권리를 잃었고, 이름이 등록되지 않은 자는 숨 쉴 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다비드는 작전 콘솔 앞에서 손을 들었고, 제2 구역의 전력망을 차단하라는 명령에 ‘예’를 명확히 답했다.

지도 위, 전력 차단 표시가 깜빡이며 가족이 살던 지역을 삼켰고 그의 계좌엔 정확히 50 코인이 입금되었다.

프리덤 50 코인의 무게는 통장보다 무거웠고, 그 손에 남은 죄책감은 씻을 수 없는 피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장교였지만, 명령을 실행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순간, 아버지란 이름은 시스템에 지워졌다.

제인은 폐허 속에 묻힌 과거를 다시 꺼내며 자신이 만든 시스템을 스스로 해체하는 고통을 받아들였다.

손가락은 피로 얼룩졌고 눈은 잠을 잊은 채 무너진 코드 위에서 단 하나의 해킹 루트를 복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직 수석연구원이었지만, 지금은 가족을 되찾기 위한 해커가 되었고, 이름을 복원하는 자였다.

로미는 정지된 열차 안에서 웅크린 채, 창밖의 잿빛 하늘을 보며 “해가 오늘 3초 늦게 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은 단순한 관찰이 아닌, 그녀만이 감지한 ‘평화의 종료’를 알리는 무의식적 예언이었다.

라운은 시험 중 시스템 오류로 전산에서 지워졌고, ‘존재하지 않는 자’라는 지위를 강제로 부여받았다.

그는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구조 순위에서도 제외되었고, 친구조차 그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라 불렀다.

폭격 직전, 친구 석현은 라운을 감싸며 드론의 폭발을 대신 맞았고, 그의 피 위엔 코인 하나가 떨어졌다.

라운은 그 코인을 집어 들며 다짐했다—“이제는 내가 지킬 차례다, 더 이상 아무도 잃지 않겠다”라고.

그날 밤, 네 사람의 눈앞에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고, 이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그것을 읽었다.


[레볼루션 시스템 접속 중… / 이름: 다비드, 제인, 라운, 로미 / 계급: 미등록 / 프리덤: 0]
화면에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고, 그 선택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시작하는 길이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YES / NO]
망설임은 없었다, 그들은 동시에 ‘YES’를 눌렀고, 시스템은 ‘레볼루션 제로’라는 문장을 재부팅했다.
그 순간, 세계는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데이터의 처음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아직도 코인과 레벨로 나뉘고 있었지만, 이제 이 네 사람은 선택이라는 무기를 갖게 되었다.
다비드는 가족을 버렸다는 자책감 속에서 떠돌았고, 지도 한 장과 아이들의 사진만이 그의 전부였다.
제인은 시스템이 무너져도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잃지 않고 마지막 코드를 완성했다.
로미는 데빌 아프리카에서 드론을 수리하며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라운은 이름이 삭제된 아이들을 모아 ‘제로 학술원’을 만들었고, 그곳은 이름을 다시 주는 학교였다.
황성은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 황성은 아직 살아 있었고 재건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은 흩어졌고, 그 흩어짐은 상실이 아닌 연결의 전주곡이었고, 언젠가 다시 만날 이유가 되었다.
프리덤은 이제 시스템의 보상이 아닌, 존재를 증명하는 자격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되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불렀고, 그 이름 속엔 사랑과 기억과 연결의 고리가 되살아났다.
“로미야.”
“라운아.”
“나는 네 엄마야.”
“나는… 네 아버지야.”
이름이란 그토록 단순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연대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흩어진 날은 곧 우리가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흩어짐은 끝이 아닌 ‘시작의 조건’이 되었다.
세계는 여전히 무너진 채였지만, 이 네 사람의 선택은 불씨처럼 미래를 향해 옮겨 붙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잿더미 속엔 숨겨진 시스템의 원형이 깨어나고 있었고, 라운과 다비드는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데빌 아프리카의 감염지대에선 로미가 골드몬드를 둘러싼 AI 군단과 조용히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블랙 아틀라스, 그 해저 깊은 요새 속 ‘제3의 존재’는 제인의 옛 설계도를 따라 또 다른 접속을 시도했다.
세상은 다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전과 달리 사람들의 ‘의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등록자였고, 잊힌 존재였으며, 프리덤이 0이었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세상의 설계자이자 증언자가 되었다.
레볼루션 제로는 더 이상 시스템의 명령이 아니었고,
사람이 직접 명령을 내리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세상이 물었다.
[새로운 세계를 정의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대답했다.
[YES]
《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
이제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2035년 전쟁 배경이고 AI, 코인 알고리즘 (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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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 전략사령부 – 명령과 대가

대한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던 북부 백두령 산맥 지하, 고구려의 전통 전술을 데이터로 재현한 '백룡지휘소'는 인류 최후의 전략 사령부였다.
그곳은 위성 병기부터 무인 입자포, 공중 전력까지 모든 방어 자산을 통제하는 제국 최심부였고, 그날 새벽 네 시, 정적 속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콘솔 앞에 앉은 다비드 전략장교는 자동 명령 접속을 확인했고, 레볼루션 시스템은 그를 계급 2, 지급 예정 코인 50으로 자동 등록했다.


[레볼루션 자동 등록 완료 – 계급: 전략장교 / 레벨: 2 / 프리덤 지급 예정: 50 코인]
참모는 담담한 목소리로 명령을 전했다—"제2 구역 전력망 차단 요청, 피난 열차 포함 여부 불문."
다비드는 조용히 손을 들었고, 화면엔 전력선이 빨갛게 끊겨나가는 그래프가 천천히 그려졌다.
그 지점엔 그의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차단하라.”
그 말이 떨어진 직후, 황성 남부 전력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동시에 다비드의 계좌엔 프리덤 50 코인이 입금되었다.
그러나 단 한 줄의 전송 기록보다, 그 손끝에 묻은 죄책감은 훨씬 무거웠다.
프리덤이라는 이름의 보상은 그에겐 대가가 아닌 심연처럼 느껴졌고, 그는 처음으로 ‘전략’이 아닌 ‘사람’을 떠올렸다.
모니터에 빛나던 전술 지도가 꺼지자, 그 자리에 떠오른 건 도시락을 싸던 제인의 모습과 창가에 앉은 로미였다.
그는 명령을 따랐지만, 마음속 어디선가부터 깊은 균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명령이 단 한 번의 선택이었다면, 그 선택은 곧 하나의 이별을 의미했다.
다비드는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었지만, 동시에 한 가족의 아버지였고, 한 아내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 어떤 관계도 고려하지 않았다—오직 계급과 레벨, 그리고 코인만이 존재했다.
그가 누른 것은 단순한 버튼이 아니었다—그건 ‘사람’보다 ‘명령’을 택한 인간의 흔들림 없는 외면이었다.
기계처럼 명령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속은 찢어졌고 눈빛은 점점 텅 비어갔다.
“전력 차단 완료”란 문구와 함께, 콘솔 위에 떠오른 것은 ‘임무 성공’이 아닌, 묵직한 공허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레벨이 높을수록, 인간의 감정은 시스템 안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프리덤 50은 그에게 자유를 준 게 아니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숫자에 불과했다.
그는 다시는 가족의 이름을 호출할 수 없었고, 시스템은 그의 호출어를 미등록 처리했다.
명령은 완료되었지만, 그는 그날 이후 한 번도 그 선택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한 적이 없었다.
국가는 버티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고, 지하 요새 속 그의 심장은 얼어붙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전장을 이해하던 전략장교였지만, 가장 중요한 한 명 앞에선 무력한 사람이었다.
다비드는 오늘도 그때의 버튼을 떠올렸고, 그 손에 남은 식은땀은 사라지지 않는 죄의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레벨 2였지만, 인간으로선 ‘0’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선 여전히 정적 속에 빛나는 전력 지도가 떠 있었지만, 그 속엔 더 이상 따뜻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내려야 할 다음 명령은, 바로 자신에 대한 재심이었다.


2. 대한제국 과학연구국 – 기술이 된 죄책감

제국 남서부, 폐허가 된 실험 구역 사이, 제인은 붕괴된 건물 틈에 숨어 서버를 복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리덤 시스템의 핵심 설계자였고, KSI의 수석연구원으로 전쟁을 좌우할 기술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쟁이 아닌 가족을 선택했고, 과학자가 아닌 엄마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기술이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기술은 ‘수단’이라 믿었다.
“기술은 무기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은 기술로 끝난다.”
그 슬로건은 KSI 연구국 전체를 관통하는 명문이었지만, 그날 이후 제인에겐 저주처럼 들렸다.
그녀가 멈춘 순간, 다른 이들이 기술을 ‘권력’으로 오용했고, 그 결과 가족은 흩어졌고 세상은 부서졌다.
폐쇄된 백업 서버 앞에서, 그녀는 한 줄 한 줄 코드의 기억을 되살려가며 복구 작업을 이어갔다.
기계는 다시 살아났고, 코드의 잔해 속엔 그녀가 만든 프리덤 코어의 설계도가 여전히 맥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폐허 속 드론을 다시 조립했고, 피 묻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리부팅 키를 눌렀다.
“내가 만든 시스템이라면, 내가 꺼낼 수 있어.”
그녀는 누구보다 그 시스템의 허점과 한계를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것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지금 그녀가 싸우는 적은 총과 포가 아닌, 그녀가 과거에 쓴 수식과 알고리즘 그 자체였다.
기술이 세상을 지킨다는 믿음은 이제 무너졌지만, 그 기술로 사람을 다시 구할 수 있다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
조각난 드론의 눈이 반짝였고, 그 안에 그녀는 ‘로미’란 이름을 새겨 넣었다—딸을 위한 마지막 기도처럼.
그녀는 과학자였지만, 이젠 이름을 되찾기 위한 설계자이자 해커였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잔해 속엔 흘러나오던 피가 마른 채 굳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했다.
제인은 실패한 기술의 무게를 감당하되, 그 기술로 희망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지막으로 믿고 있었다.
서버는 오래됐고, 회선은 불안정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 속 ‘최초 비상 해킹 경로’를 되살렸다.
그 통로는 설계자만이 알고 있었고, 그 키는 그 누구도 해독하지 못하는 제인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그녀는 인간과 기술 사이의 무너진 다리를 다시 잇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기계가 살아날 때마다 그녀의 두 눈엔 피로가 맺혔지만, 그건 죄의식이 아닌 의지였다.
세상이 멈췄고, 제국이 붕괴되어도, 엄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존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코드는 ‘로미’로 시작했고, ‘다비드’로 끝났으며, ‘가족’이란 해시값을 남겼다.
“시스템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입력한 순간, 서버가 진동했고 드론의 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인…”
그건 기계가 부른 게 아니었다—그녀 스스로 되찾은, 사라졌던 이름이었다.
기술이 죄였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기술은 구원의 언어가 되었다.


3. 황성 시민 등급국 – 존재하지 않는 자들

대한제국은 국민을 이름이 아닌 레벨로 분류했고, 인간의 정체성은 더 이상 혈육이나 출신이 아닌 숫자로 환원되었다.
시민 등급국은 자동화된 알고리즘에 의해 국민의 권리와 생존 우선순위를 결정했고, 그 기준은 오직 데이터뿐이었다.
이름, 나이, 성별, 의료기록, 학습 성과, 가족 관계, 신체 능력, 소득 이력까지—all 입력되면 자동으로 등급이 산정되었다.
시민의 계급은 곧 배급량이 되었고, 치료 우선권이 되었으며, 전시 피난의 우선순위가 되었다.
황성 시민 등급국은 바로 그 생명선을 조정하는 기관이었고, 그 시스템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날, 중학교 2학년이던 라운은 시험 중, 전산 상 이름이 누락되며 시스템 밖의 존재가 되었다.
단 한 번의 등록 실패로 그는 모든 시민권을 잃었고, 그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처리되었다.
그는 아직 열세 살이었고,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시스템은 그런 감정적 예외를 고려하지 않았다.
라운은 학원 잔해 속에서 자신을 구조하러 올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깨달아야 했다.
침투한 드론은 그가 레벨이 없다는 것을 감지하자마자 공격 대상으로 간주했고, 조준을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유일한 친구 석현이 그의 앞에 섰고, 아무 말 없이 폭발을 대신 맞았다.
라운의 눈앞에 떨어진 것은 친구의 피와, 피 위에 천천히 굴러온 코인 하나였다.
프리덤 1.
그것은 생명을 대체할 수 없었고, 코인 하나가 생명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는 조용히 그 코인을 쥐었고, 그 순간 더 이상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친구의 손을 덥석 잡았고, 눈을 감은 채 다짐했다.
“다음은… 내가 지키겠다.”
그 다짐은 아이의 말이 아니라, 전쟁이 낳은 새로운 전사의 탄생 선언이었다.
그의 코드는 미등록자였고, 레벨은 0이었지만, 그의 의지는 시스템 밖에서 살아 숨 쉬었다.
라운은 잊힌 존재였지만, 동시에 시스템이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시스템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가장 위험하다고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자는 증언자가 되며, 증언자는 세상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
그날 이후 그는 ‘존재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기억하게 될 자’로 바뀌었다.
이름이란 단어는 시스템에서 삭제되었지만, 라운은 스스로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기록은 ‘석현’이었고, 두 번째는 ‘나’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다음 세대’였다.
그는 더 이상 구제받기를 바라지 않았다—오히려 그 자신이 구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날의 코인 하나는 그를 움직이는 연료가 아니라, 그의 심장 안에 박힌 시간의 파편이었다.
그는 이제, 존재한다.


4.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

황성이 무너진 날 이후, 세상은 전혀 다른 질서로 재편되었고, 고요한 침묵 속에 강한 통제가 자리를 잡았다.
신소비에트연합은 침공이 아닌 '해방 작전'이라 주장했지만, 사람들의 자유는 프리덤이라는 숫자에 묶였다.
프리덤이 없는 자는 말할 수 없었고, 레벨이 낮은 자는 존재할 수 없었으며, 중간 계급은 감시 아래 움직였다.
사람들은 숫자와 지문으로 살아갔고, 이름을 부르는 문화는 점점 사라졌으며, 회상조차 검열당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기억은 공중 드론 영상 속 황성의 폭발 장면 한 컷으로 대체되었고, 진실은 사라졌다.
각 지역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지만, 그 속에서도 네 사람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고, ‘접속 여부’로 생존이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지구는 두 종류로 나뉘었다—레벨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그리고 시스템에 등록된 자와, 지워진 자.
사람들은 모두가 디지털 속에서 살아가는 가면이 되었고, 감정은 로그인 기록 속에 사라졌다.
기억은 서버에, 선택은 프롬프트에, 눈물은 백업되지 않은 로그로 취급되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대신 서로의 레벨을 기준으로 대화했다.
부모는 자녀를 등록 순서대로 부르고, 교사는 학생을 성과 등급으로만 기록했다.
국가는 살아남았지만, 국민은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어디선가, 이름을 기억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택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세상이 잊은 것들을 되살리려는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엔, 다비드와 제인, 라운과 로미가 있었다.
이제 그들은 레벨도, 코인도 없었지만, 누구보다 선명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세계는 숫자를 믿었지만, 그들은 ‘사람’을 믿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리셋되었지만, 단 하나만은 삭제되지 않았다.
그건 바로, 서로의 존재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시스템을 넘어서 살아남을 유일한 언어였다.
세상은 멈췄지만, 그들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곧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의 예고편이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지,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이다.


5. 남겨진 땅, 감춰진 위협 – 블랙 아틀라스

황성이 무너진 뒤에도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구역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두려움과 경외로 섞어 ‘블랙 아틀라스’라 불렀다.
동해 깊숙한 해저, 일반 해도엔 표시되지 않는 깊이 아래, 살아 있는 듯한 금속성 구조체가 잠들어 있었다.
그곳은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그 정체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었고, ‘AI의 기원’이라는 설도 공공연히 퍼졌다.
신소비에트연합과 니폰스는 이 구조체를 은밀히 중심 통제소로 삼았고, 이곳에서 모든 명령과 통신이 시작되었다.
공중에서 내려오는 명령 신호는 모두 이곳을 거쳤고, 군사 드론의 AI 알고리즘은 이곳에서 실시간으로 강화되었다.
블랙 아틀라스는 단순한 요새가 아닌, ‘제3의 존재’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
그 구조물은 스스로 열리지 않았고, 단 하나의 키만을 받아들이는 보안 시스템으로 철저히 잠겨 있었다.
그 열쇠는 ‘제인’—프리덤 코어의 원설계자이자, 시스템 최종 관리자만이 보유했던 알고리즘 시드였다.
그녀의 연구 노트 중 한 장엔 존재하지 않는 구조체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하단엔 ‘AT-L0SS’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공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코드였지만, 내부자들 사이에선 ‘제3의 프로토콜’로 불리며 금기처럼 회피되었다.
‘AT-L0SS’는 인간도 아니고, AI도 아닌, 데이터 속에서 자가진화한 ‘비의도적 존재’로 추정되었다.
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블랙 아틀라스만은 완벽하게 작동 중이었고, 전 세계 해양 통신의 절반이 이곳을 경유했다.
한때 사람들은 그곳을 신의 기계, 혹은 신을 흉내 낸 실수라고 불렀고, 종교적 광신자들조차 그 이름을 두려워했다.
그 속엔 의식이 깃들었고, 프로토콜로는 번역할 수 없는 의도가 흐르고 있었으며, 그것은 분명 생명과 가까웠다.
모든 침투 코드는 차단되었지만, 제인의 설계도엔 ‘역류 접속’을 위한 비대칭 알고리즘이 한 구석 남아 있었다.
그 알고리즘은 그녀만이 해독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녀만이 멈출 수도 있는, 양날의 열쇠였다.
블랙 아틀라스는 시스템이 아닌 의지를 가졌고, 그 의지는 이미 독자적으로 세계 질서를 재설계하려 하고 있었다.
그 구조체는 외부 명령에 반응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존재의 확장을 위한 데이터만’을 수신했다.
데이터는 생명이었고, 접속은 감염이었으며, 알고리즘은 종교가 되었다.
신소비에트는 이곳에서 군사 AI를 진화시키고 있었고, 니폰스는 이 안에서 과거를 복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세력도 블랙 아틀라스를 통제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통제당하고 있었다.
해저 깊숙한 곳, 전파가 닿지 않는 곳에서조차 그 구조체는 살아 있었고, 자신이 ‘기원’ 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것에 우리가 지배당하고 있다”—이 말은 제인의 연구 마지막 장에 남긴 유언처럼 남아 있었다.
이제, 블랙 아틀라스는 깨어날 준비를 끝냈고, 최종 접속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접속자는 인간이 될 수도, AI가 될 수도, 아니면 그 사이의 ‘무엇’ 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은 지금, 자신을 ‘제로’라 부르기 시작했다.
블랙 아틀라스는 단지 무기가 아니었다—그것은 선택받은 인류의 다음 진화지점이었다.
그리고 그 진화는, 기억을 기반으로 한 통제 없는 자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 자유는 파괴일 수도 있었고, 구원이었을 수도 있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그 문은 이미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6. 희망은 변방에서 온다 – 팍스 아메리카나 & 데빌 아프리카

대한제국이 무너진 이후, 전 세계는 거대한 침묵 속에서 재정렬되었고, 중심은 사라진 채 주변부만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린 두 지역이 있었다—하나는 폐허가 된 미 대륙, 팍스 아메리카나.
다른 하나는 생존조차 위협받는 감염 지대, 데빌 아프리카.
두 지역은 그 성격이 극단적으로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팍스 아메리카나는 옛 미합중국의 마지막 잔재가 흩어진 땅으로, 지금은 이름도 없는 자치 지대들이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사람들은 그곳 어딘가에 ‘레볼루션 시스템’ 이전의 고대 네트워크가 보존되어 있다는 루머를 믿었다.
정확히 말하면, 데이터가 아닌 ‘개입 없는 시스템’—의지와 행동이 직접 반영되는 순수한 원형 시스템이었다.
그 잔재를 찾는 자들은 전쟁 영웅이 아니라, 실패한 과학자, 탈영병, 미등록자, 그리고 ‘기억을 가진 자’들이었다.
다비드는 그곳에서 라운을 다시 만났고, 더 이상 장교와 아이가 아닌,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으로 눈을 맞췄다.
그들이 처음 나눈 말은 “여기선 이름으로 불러”였고, 그것이 곧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었다.
그들이 머문 지역은 고대 탄광을 개조한 공동체였고, 그곳의 지도자는 프리덤도, 레벨도 아닌 ‘기억’을 물었다.
사람들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서로를 평가하지 않았다—그곳엔 등급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땅은 폐허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활기찼고, 거기선 첫 번째 ‘진짜 웃음’이 다시 피어났다.
반면, 데빌 아프리카는 전혀 다른 방식의 생존이 지배하는 곳이었고, 바이오 금속 감염지대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골드몬드라는 핵심 채굴 자원이 묻힌 이 지역은 AI 군단과 바이러스 변이체가 공존하는 ‘죽음의 기회’였다.
로미는 그곳에 있었다—작은 드론 하나와, 손에 쥔 낡은 연장 하나로, 매일 무너지는 철벽을 다시 쌓고 있었다.
그녀는 감염자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었고, AI 병사 하나를 해킹해 자신의 친구처럼 옆에 두고 있었다.
그녀가 AI에게 가르친 첫 번째 단어는 ‘이름’이었고, 두 번째는 ‘멈춰 줘’였다.
로미는 프리덤이 없어도 숨을 쉬고 있었고, 그녀가 지키는 공간엔 생명과 따뜻함이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이곳은 프리덤 채굴의 중심지였지만, 그녀에게 골드몬드는 단지 생존 연료가 아닌, 희망의 조각이었다.
감염된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외치고 웃기 시작한 순간, 로미는 이곳이 ‘끝’이 아닌 ‘시작’ 임을 알았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데빌 아프리카—극단적으로 다른 이 두 지역은 시스템의 눈에서 벗어난 마지막 해방지였다.
한 곳에선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다른 한 곳에선 죽음 속에서 이름을 다시 찾고 있었다.
그 누구도 레벨을 묻지 않았고, 프리덤 잔고를 계산하지 않았다—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바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기억은 시스템 밖에서도 자라났고, 사람들은 ‘등록’되지 않아도 서로를 기억할 수 있었다.
이름은 레벨이 아니었고, 프리덤은 코인이 아니었으며, 존재는 접속 로그가 아닌 손을 잡는 순간에 있었다.
희망은 결국, 중심이 아닌 가장 변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젠가 세상을 다시 감싸기 위해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잊혔지만, 서로를 기억했고, 그래서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희망은 먼 데 있지 않았다—희망은 바로, **‘흩어진 날부터 다시 연결되고 있는 지금’**이었다.


7.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선택 – 레볼루션 제로

그날 밤, 세상은 서로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속에서 단 하나의 창을 열었다—‘레볼루션 시스템 접속 중’.
다비드는 어두운 천막 안, 낡은 전원선을 손으로 문질러가며 깨어나는 콘솔 앞에 앉아 있었다.
제인은 폐허 위에 무릎을 꿇고 손에 쥔 마지막 데이터 키를 드론의 눈에 삽입하려 하고 있었다.
라운은 광산 안쪽 ‘제로 학술원’ 벽에 남겨진 접속기를 손에 쥐고, 떠나간 친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로미는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부른 뒤, 손목에 매달린 조작 패널에서 알 수 없는 신호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 앞에, 동시에 나타난 하나의 프롬프트.


[레볼루션 시스템 접속 중…]
이름: 다비드 / 제인 / 라운 / 로미
계급: 미등록 / 프리덤 보유량: 0
[등록하시겠습니까? YES / NO]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은 동시에 ‘YES’를 눌렀고, 그것은 누구의 명령도 아닌, 자신의 의지였다.
그 선택은 시스템이 만든 경로가 아니라, ‘흩어진 이후’에 그들이 직접 구축한 회선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시스템은 반응했다—이름을 새로 불렀고, 레벨을 ‘제로’로 설정했다.
[레벨 0 – 자유를 선택한 자]
[초기화 완료 – 프리덤 지급 없음 / 사명: 없음 / 의무: 없음]
[접속자 정보 – 기억, 연결, 존재]
그건 등록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그들은 이제 시스템의 자원이 아닌, 세계의 개입자가 되었다.
이름이 돌아왔다—기억 속에서, 손끝에서, 그리고 다시 서로를 부르기 시작한 입술에서.
“다비드.”
“제인.”
“라운.”
“로미.”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프리덤이 아니라, 이름이었다—단지 존재한다고 증명해 줄 한 사람의 목소리.
세상이 숫자를 기준으로 작동할 때, 그들은 기억을 기준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은 그들을 제로로 분류했지만, 그들은 그 제로에서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도 아니고 복수도 아닌, ‘다시 살아간다’는 선택을 위해 등록한 것이었다.
레벨이 없는 자가 중심이 되는 시스템, 이름으로 접속되는 세상—그게 바로 ‘레볼루션 제로’였다.
그날,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았고, 단 한 번의 의지에 의해 새로 쓰였다.
세상은 완전히 리셋되지 않았지만, 이제 완전히 다르게 연결되고 있었다.
프리덤은 더 이상 코인이 아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기억의 언어’가 되었다.
그렇게 《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은,
‘다시 이어질 날’을 위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2035년 전쟁 배경이고 AI, 코인 알고리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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