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누군가의 안전을 지켜야 하고, 규율을 지켜야 하며, 때로는 감정을 억누르고 버텨야 하는 삶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삶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늘 누군가를 이끌어야 했고, 앞장서야 했으며,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시스템을 돌려야 했다. 부대(부서) 전체의 사기를 책임지는 위치에서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은 뒤로 밀어놓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었다. 화가 나면 참거나, 무조건 윽박지르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땐 아무렇지 않은 척 일만 했다.
가족 앞에서도 나는 늘 ‘책임을 다하는 아빠’로만 남으려 했다. 정작 아이들의 마음에 귀 기울이거나, 아내의 말에 천천히 답하는 일엔 익숙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생긴 후에도 나는 여전히 '리더'의 자세를 내려놓지 못했다. 아이가 실수했을 때는 지적부터 했고, 아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나도 힘들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느 날, 딸이 식탁에서 물컵을 쏟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딸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빠..." 그 짧은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메말라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이는 실수했을 뿐인데, 나는 마치 명령을 어긴 부하에게 화내듯 반응했다.
그런 나에게 책은 한동안 멀어진 존재였다. 학창시절 이후로는 책을 ‘의무’로만 읽었다. “언젠간 읽어야지.” “시간 나면 보자.” 그렇게 미뤄둔 책들이 어느새 내 삶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날 밤, 퇴근 후 나는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렀다. 우연히 들른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손에 잡힌 책 한 권, 『말 그릇』이었다. 책 속의 한 문장이 마음을 때렸다. "사람은 말로 관계를 만들고, 말로 관계를 무너뜨린다." 나는 그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아내와의 대화, 아이들과의 대화... 나는 말이 아닌 '통제'로만 관계를 맺어왔던 건 아닐까.
책은 말없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음 날 또 도서관으로 향했다.
• 독서가 내 삶에 들어온 날
그 후 나는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기계발서 몇 권이었다. 『하루 3줄 감정 수업』, 『엄마의 말하기 연습』, 『공감의 기술』 같은 책들이었다. 놀랍게도 그 안엔 '리더십'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었다.
어느 날, 아내와 사소한 집안일로 말다툼을 했다. 나는 접힌 빨래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며 아내가 조심스럽게 지적했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별일 아닌데도 서로 감정이 상한 채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그냥 각자 등을 돌리고 잠들었겠지만, 나는 책에서 읽은 한 문장을 떠올렸다.
"진심을 담은 사과는 타이밍보다 용기가 먼저다."
그날 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말이 좀 날카로웠던 것 같아. 미안해."
아내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 순간, 사소한 집안일보다 서로의 마음을 먼저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대화 하나가, 우리 사이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그 후로 나는 책에서 읽은 표현들을 메모장에 적어두기 시작했다. 육아와 결혼생활은 결국 '말'로 풀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책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단순한 표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 조용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이 깊어지면,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그 변화는 아주 작고 느리지만, 분명히 삶에 흔적을 남긴다.
아이들과 마주할 때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거나, 내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이면 다그치고, 그 이유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통해 ‘아이의 감정 언어’를 이해하면서, 이제는 내가 먼저 아이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과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라는 걸 깨달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할 말을 준비하거나, 해결책을 생각하는 데 더 집중했다. 하지만 책을 통해 ‘경청’과 ‘공감’의 진짜 의미를 배우면서, 이제는 어떤 조언이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아내의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려는 태도’가 우리 대화를 훨씬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공감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라는 책 속 문장이 깊이 와 닿았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나는 우리 집의 밤을 '굿나잇 독서'로 바꾸기로 했다. 하루하루 바쁘게 지나가면서, 아이들과 진짜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하루를 책과 함께 마무리하면, 아이들의 기억에 따뜻한 아빠의 목소리가 남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 침대에 나란히 누워 책을 한 권씩 읽어주는 시간. 처음엔 아이들이 금방 졸려 했지만, 이젠 스스로 "아빠, 오늘은 무슨 책 읽어줘?" 하고 묻는다. 『구름빵』을 읽던 날,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비 오는 아침, 고양이 남매가 주운 구름 조각으로 빵을 만들어, 온 가족이 하늘을 나는 이야기. "아빠, 우리도 구름빵 먹으면 날 수 있어?" 하고 딸이 내 팔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나는 웃으며 딸을 꼭 안아주었다.
"아빠 목소리 들으니까 마음이 따뜻해져," 딸의 속삭임에 나는 조용히 책장을 덮고, 아이들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책이 우리 가족의 하루를,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고 있었다.
책은 나를 공격적인 리더에서 배려하는 아빠, 이해하는 남편, 질문하는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 하루 한 권, 루틴이 된 독서
나는 매일 책을 읽는다. 출퇴근 시간, 점심시간, 아이들이 잠든 밤 짧은 틈을 붙잡아 하루 한 권의 책을 읽는다. 처음엔 10페이지조차 집중하기 어려웠다. 눈은 활자를 따라가도, 마음은 딴생각으로 흘러가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지 않으면 하루가 허전해졌다. 책 읽기는 어느새 나의 리듬이 되었다. 루틴이란 결국, '작은 성공을 반복하는 습관'이라는 걸 책이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작은 성취감을 얻는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기 위해, 나는 방법을 달리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밀리의 서재 앱을 켜고 오디오북을 들었다. 지하철이 흔들리는 동안에도, 버스가 막히는 동안에도, 좋은 문장들은 귀를 타고 조용히 마음속에 쌓여갔다. 운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로에 집중하면서도, 한쪽 귀로는 천천히 책을 들었다. 오디오북을 통해,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지던 차 안도 작은 도서관처럼 변했다.
책장을 넘기지 못할 때는, 목소리로 책을 듣고, 문장 하나를 가슴에 새기며 하루를 완성했다. 책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기다려주는 친구였다. 손에 들고 읽든, 귀로 듣든, 책과 함께하는 하루는 늘 조금 더 충만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작은 성취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 성취감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훈육의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떼를 쓰면 화부터 냈다. "하지 마! 몇 번 말했니!"
어느 날, 아들이 숙제하는 시간에 자꾸 딴짓을 하고, 책상에 엎드려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집중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아들은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나한테 맨날 화만 내..." 그 말에 나는 멈췄다. 내 아이는 내가 화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그날 밤, 나는 『아빠의 아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빠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 다만 아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줄 수 있으면 된다." 그 문장이 깊이 남았다. 이후로 나는 아이가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 먼저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지금 속상했어?" "아빠가 옆에 있어줄까?"
아이를 가르치려 하거나 감정을 고치려 하기보다, 그저 아이의 곁에 조용히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아빠로서의 작은 변화가, 아이의 눈빛을 바꾸고, 우리 가족의 하루를 조금씩 따뜻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변화를 느끼던 어느 주말, 나는 가족에게 말했다. "이번 주말엔 우리 같이 도서관에 가볼까?"
아내와 아이들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 좋은 토요일 아침,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은 도서관까지 가는 길에도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아빠, 나 만화책 고를 거야!" "나는 두꺼운 책 읽을 거야!" 도서관에 도착해 문을 열자, 차분하고 포근한 공기가 우리를 맞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 책 코너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빠, 이 책 읽어보고 싶어!" 아들이 꺼내든 책은 『알사탕』이었다. 나는 아들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책 표지를 함께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전해주는 동그란 사탕 이야기. "그래, 오늘은 이 책부터 읽어보자." 우리는 조용한 도서관 구석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아이들은 책 속으로 빠져들었고, 나는 그런 아이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평소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작지만 소중한 시간. 책을 다 읽고 도서관을 나오자, 아이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빠,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우리는 도서관 앞 작은 빵집에 들렀다. 따뜻한 빵과 커피, 아이들을 위한 달콤한 코코아 한 잔. 창밖으로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지는 오후, 가족 모두가 웃으며 나누는 시간이 그렇게 특별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가 단순히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과, 이 가족과 함께 더 오래 웃기 위해서라는 것을.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었다. 출근 전 20분, 점심시간 30분, 잠들기 전 40분. 짧은 시간을 쪼개 하루 한 권을 완독하는 것이 목표였다. 어떤 날은 피곤해서 책장을 넘기기조차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루틴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변화를 묵묵히 반복하는 일이었다.
책장을 덮을 때마다 나는 오늘 하루, 아빠로서 조금은 더 나아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이 숙제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빠, 오늘은 나 잘했지?"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며 답했다. "응, 정말 잘했어. 아빠는 네가 자랑스러워." 아이는 부끄러운 듯 웃더니, 내 품에 가만히 안겼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매일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쌓은 작은 변화들이, 이렇게 아이와 나 사이에 따뜻한 다리를 놓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빠는 책을 통해 조금씩 배우고 있어. 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말이야."
그 말이 언젠가 아이들의 기억 속에 따뜻하게 남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조용히 도서관으로 퇴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