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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

EP.01 – 첫 코인은 피로 얻는다

by 라이브러리 파파

2035년 6월 6일, 새벽 4시 13분.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황성의 새벽은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시작되었지만, 그날은 공기부터 달랐다. 미세먼지가 아닌, 전자 진동의 정전기성 입자가 피부를 파고들 듯 쏟아졌고, 건물 벽면을 타고 흐르는 데이터 파이프라인은 조용히 속도를 줄였다. 정보망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생물처럼 조용해졌다.

《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2035년 전쟁 배경이고 AI, 코인 알고리즘 (3).jpg

도로 옆, 꽃가게 간판은 미세하게 떨렸다. 자동화된 도자기 전등은 규칙적으로 깜빡였지만, 빛의 주기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골목 어귀의 보안등 하나는 자기 혼자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했고, 그 불빛 아래 벤치에 앉아있던 노인은 멀리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가만히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오나보군…”

시민들은 아직 몰랐다. 이 조용한 아침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평범한 아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한 아이가 무인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손바닥을 기기에 올려 코인을 등록했지만, 기계는 반응하지 않았다. ‘접속 오류. 시스템 점검 중입니다.’ 그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용히 돌아서 집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무인 배송 드론 하나가 아이의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았다. 비행 궤도가 흔들렸고, 아이의 그림자를 밟을 뻔한 후 급제동하며 머물렀다. 드론은 잠시 공중에 멈췄다가 데이터 링크를 끊고 이탈했다. 그 아래, 벽화 속 고구려 장수의 눈은 마치 실제 인물처럼 차갑고 무심하게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갈라졌다. 북쪽 백두령 상공에서, 첫 번째 전투 드론이 음속을 깨며 진입했다. 공기는 찢어졌고, 구름은 소용돌이쳤으며,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던 햇살은 무기력하게 물러섰다. 2.1초 후, 대한제국 위성 방어막이 반응했다. 붉은 방어포가 상공을 가르며 불을 뿜었고, 도심 상공의 차폐 드론들이 자동 비산 모드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0.8초 빨리, 백룡지휘소에선 단 하나의 암호가 입력되었다. “제로 리셋.” 그 명령은 곧장 제국 전역으로 전달되었다. 우선, 황성 시민 등급국의 메인 서버가 다운되었다. 교통망, 의료 드론, 공공 에너지망은 일제히 ‘비상 모드’로 진입하며 잠금 되었다. 길 위의 자율버스는 멈췄고, 응급센터의 자동문은 잠겼으며, 스마트폰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모든 연결이 ‘멈춤’을 명령받은 순간. 황성 전역의 공중사이렌이 동시에 울렸다. “주의. 프리덤 전쟁 발발. 모든 시민은 즉시 레볼루션 시스템에 등록하십시오.” 그 경고음은 낮게 깔리며, 마치 가슴 아래를 쿵쿵 울리는 저주처럼 퍼져나갔다.

황성 북부의 초고층 건물 안, 한 여성이 스마트 글라스를 벗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부의 기지사령부 안, 한 남성이 전투복 위로 가족사진을 덮었다. 황성 중심가에서 뛰놀던 한 아이는 자신의 팔목에 빛나는 붉은 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멀리 열차 객실 안, 작은 손으로 창틀을 잡고 하늘을 보던 소녀는 무언가 말없이 속삭였다.

대한제국의 상공에는 고대 문명의 흔적이라 불리는 ‘사신위성’이 떠 있었다. 백호, 주작, 현무, 청룡—사방신의 이름을 딴 전략위성들은 자동 명령에 따라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 위에서 조정되는 입자포와 EMP 차단망은 도시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을 드리웠다. 그러나 그날, 사신위성 중 ‘청룡’ 하나는 명령에 응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백룡지휘소 내부, 레벨 6 고위 계급 장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우릴 먼저 노린 건… 내부야.” 무선망은 끊기고, 대체 회선은 고대 전통 암호 방식으로 회귀되었다. 명령은 더 이상 AI가 전달하지 않았다. 사람의 손이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 수도권 전체의 레볼루션 시스템이 수동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건 곧, ‘모든 시민이 직접 등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율 행위와 판단. 그러나 등록을 하지 못하면? 시스템은 레벨 제로로 간주했다. 의료, 피난, 식량 배급…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 결과, 대한제국 각지에서 네 명의 사람에게 동일한 창이 떠올랐다.


[레볼루션 시스템 접속 중…]
이름: 다비드 / 제인 / 라운 / 로미
계급: 미등록
프리덤 보유량: 0
[등록하시겠습니까? YES / NO]



[다비드 – 전략장교의 선택]

백룡지휘소 내부는 숨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침묵에 잠겨 있었고, 벽면을 따라 이어진 유기광 섬유선들은 비상 체계 돌입을 알리듯 붉게 점멸하며 공간 전체를 붉은 기운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전면 스크린에는 황성 전역의 실시간 위성 영상이 투사되고 있었으며, 각 구역은 붉은 선으로 나뉘어 있었고, 수백 개의 드론 궤적이 점멸하며 궤도를 바꾸는 가운데 단 하나의 구역, '2 구역'만이 심장처럼 격렬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다비드는 그 좌표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그 지점은 로미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었고, 제인이 자주 장을 보던 재래시장 골목이었으며, 가족이 함께 산책하던 공원 벤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적 드론 침투 우려가 가장 높은 구역으로 분류되었고, ‘즉시 차단’ 명령이 사령부에 상신되어 있었다.
보조 참모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중령님, 민간 열차 포함 구역입니다. 작전 승인 여부 확인 바랍니다.”
다비드는 말없이 전면 콘솔에 손을 얹었고, 손목 안쪽에 이식된 레볼칩이 반응하며 스마트 글라스 우측에 푸른빛으로 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작전 승인 시 – 프리덤 50 지급 예정]
차가운 문장의 뒷면에는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웃음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사랑하는 가족의 흔적이 아프도록 선명하게 겹쳐져 있었다.
다비드는 주머니 안쪽에서 조심스럽게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햇빛이 따스하던 어느 여름 오후, 공원 잔디 위에서 제인이 수박을 나눠주고 로미는 인형을 들고 환히 웃고 있었던, 그날이 사진 속에서 영원히 멈춰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미소는 화면 속 붉은 구역 어딘가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차단하라.”
그는 낮게, 단호하게 말했다.
붉은 선은 서서히 회색으로 바뀌며, 그곳에 있었던 수천 명의 이동권은 시스템 상에서 사라졌다.
[작전 승인 완료 – 레벨 2 유지 / 프리덤 50 지급]
그러나 그는 그 보상창을 끝까지 바라보지 않았다.
프리덤이라는 가상의 화폐가 이 순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1 코인은 500만원,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가족의 안부 한 마디만이 그보다 더 귀했다.
다비드는 시선을 내리고 천천히 책상 아래를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손에 쥐곤 했던 장교용 권총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수백 번 분해하고 재조립한 그 권총, 한 발의 탄환만 남겨진 그것은 ‘자기 방어용’으로 지급된 마지막 방어 수단이었다.
그는 가끔 생각했다.
‘이걸로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지금 그 질문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닌 현실이 되어 그를 눌렀다.
창문 너머 황성의 하늘은 이미 연기로 뒤덮였고, 도심에서 올라오는 불빛은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의 절규처럼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제인은 어딘가에서 서버를 복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미는 열차 안에서 울고 있을 수도 있고, 라운은 중학생 신분으로 피난 대상에도 들지 못한 채 폐허의 학교에서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비드는 목울대를 꾹 누르며 시스템 창을 닫았다.
코인은 안길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울고 있는 아이를 위로할 수도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내가 지켜야 할 건 저 숫자가 아니야.”
“숫자 바깥에 있는 사람들… 그들이 내 전부야.”
그는 다시 콘솔을 펼쳤다.
이번엔 전장 지도가 아닌, 민간 구조 루트가 담긴 비인가 작전 지도를 열었다.
그 지도는 전략사령부 내에서도 레벨 3 이상만 접근 가능한 데이터였고, 그는 손끝으로 황성 북부의 철도 창고를 가리켰다.
그곳은 라운이 과거 학교 봉사 프로그램으로 자주 갔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민간인 대피 열차가 지나가는 마지막 수동 루트였다.
그는 자신의 군용 네트워크 단말기에서 직접 수기 코드를 입력해 특수지원부대에 메시지를 전송했다.
“자원 배분 불균형 지역. 구조 우선순위 수동 수정 요청. 목표: 북부 창고, 민간 유소년 다수 존재 가능성.”
AI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중앙 서버는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남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언젠가 이 기록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명령은 시스템이 내리지만, 구조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단정히 걸려 있던 군용 외투를 벗고, 전술용 방탄조끼를 착용했다.
헬멧은 쓰지 않았다.
그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드론 호출기를 꺼내 위치를 동기화시켰고, 백업 배터리를 장비에 장착했다.
모든 체계를 무시하고, 이제 단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번엔, 내가 먼저 간다.”
그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 뜨겁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인 – 기술로 다시 시작하는 죄책감]

폐허가 된 연구소의 어둠 속에서 제인은 묵은 숨을 들이쉬며 손에 쥔 납땜기의 열기로 손끝을 녹이고 있었다.
깨어진 강화유리 아래엔 커피가 식은 채 엎질러져 있었고, 그 옆엔 로미가 몇 년 전 남기고 간 무지개색 종이학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학을 주워 손바닥에 올려두고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밤을 새우며 레볼루션 코어의 알고리즘을 설계하던 시절, 아이를 품에 안고 노트북을 두드리던 순간, 그리고 한때 이 기술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시절을.

그러나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이곳은 구조물 붕괴 경고가 내려진 지 오래인 폐허였고, 벽엔 불에 그을린 데이터 차트와 연구윤리 경고문이 반쯤 타다 남아 있었다.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회로를 재정렬하며 속삭였다. "내가 만든 시스템이라면… 내가 무너뜨릴 수 있어."
손목 안쪽의 레볼칩이 반응하며 은은하게 진동했고, 그 진동은 마치 오래된 기술이 마지막으로 내는 심장소리처럼 느껴졌다.

스마트 렌즈에는 시스템의 백도어에 접속하는 경고 창이 떴고, 전송 패킷 속도는 불안정했지만 그녀는 코드를 조립하듯 입력했다.


[접속됨 – 비인가 회선 / 레벨 1 등록 / 프리덤 10 지급]
알림 창이 떴을 때 그녀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 그녀가 원했던 건 데이터가 아닌 생존이었다.


“로미, 넌 살아 있어야 해.”
그녀는 오래된 드론 코어 하나를 작동시키며, 폐기된 감시 위성의 서브 연결을 시도했다.
배터리는 이미 수명이 다했지만, 회로 중 하나가 연결되자 잔상처럼 희미한 위치 좌표가 떠올랐다.
황성 남부 폐선 구역, 열차 정차 지점 근처—그곳이었다.
그녀는 전원을 붙잡고 손끝으로 드론을 부팅했다.
그 조용한 기계의 깜빡임이 그녀에겐 구조 요청보다도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무너진 건물 위층에서 미세한 충격이 일었고, 콘크리트 벽체가 갈라지며 파편이 떨어졌다.
제인은 재빨리 노트북과 코어를 백팩에 담고, 보호 헬멧을 눌러썼다.
작업용 슈트는 먼지에 젖어 무겁게 늘어졌고, 그 속에 그녀의 몸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통신 단말기를 열고 패킷 신호를 분석한 그녀는, 로미의 레볼칩 반응과 유사한 주파수를 감지했다.
프리덤의 흔적이 아닌, 정제되지 않은 감응 능력 계열의 미등록 기록.
‘로미가 맞아.’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낡은 리튬 배터리는 이미 과열되고 있었고, 회로엔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수동 충전기를 돌리며 전원을 유지했다.
창 밖에선 드론이 저공비행을 시작했고, 황성 상공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한때 자신이 믿었던 것들—기술, 예측, 알고리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아이 하나 찾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 손으로 지킬 수 있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정당성이었다.

“로미야, 기다려. 엄마가 가고 있어.”
그녀는 폐허를 박차고 나섰고, 걸음을 뗄 때마다 뒤편 벽이 무너져 내리며 잿더미가 흩날렸다.
지하 회선 쪽으로 연결된 비상 도로를 통해, 그녀는 남부 방면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이 발걸음은 전선의 저항만큼이나 무거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가방 안엔 로미가 유치원 졸업식 때 선물한 보조 배터리가 들어 있었다.
‘엄마, 이거면 밤새도록 일할 수 있어!’ 그 말이 지금 그녀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벽화 아래 아이들이 그려놓은 ‘가족’이라는 낙서를 지나며, 그녀는 가방을 한 번 더 움켜쥐었다.
‘이건 그냥 구조가 아니야. 내가 다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시작이야.’

황성 외곽의 폐선 구간엔 여전히 폭격 경보음이 퍼지고 있었다.
탐지 드론이 정수장 근처를 순찰하고 있었고, 미등록 신호에 대한 경고가 떴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기계 뒤편으로 몸을 피했다.
숨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렌즈 속 지도를 펼쳤다.

거기엔 ‘열차 잔해 – 정지 상태 – 감응 능력자 판정’이라는 단서가 떠 있었다.
그녀는 마스크를 고쳐 쓰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이제는 과학자도, 시스템 개발자도 아닌, 단지 아이를 찾아가는 엄마로서.

그리고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기술이 사람을 살릴 수 없다면, 기술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는 윤리였다.



[라운 – 처음 맞선 공포, 그 이후의 선택]


무너진 학원 건물의 복도 끝에서 라운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붕은 불길에 녹아내렸고, 천장의 구조물은 휘어진 채로 매달려 있어 언제 그를 짓눌러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상태였다.
바닥은 먼지와 화약, 깨진 유리 조각과 함께 붉게 말라붙은 피로 뒤덮여 있었고, 코를 찌르는 냄새는 더 이상 이곳이 학교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뒤로 숨으며 고철 더미에서 집어온 녹슨 쇠파이프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말라붙은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고, 떨리는 손가락 끝은 여전히 친구의 체온을 잃은 그 순간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발밑, 형처럼 따르던 석현의 몸이 식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라운은 그 곁에서 계속 조용히 말했다.
“형, 나 때문에 이런 거지… 그렇지?”
그가 피하라고 소리쳤던 순간, 석현은 대신 드론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용기는, 생명을 대신하는 선택이 되어버렸다.

라운은 입술을 물었다.
다시 울고 싶었지만, 지금은 눈물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무너진 천장 너머로 외곽 드론의 낮은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반짝이는 적외선 스캐너가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그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피부 아래에 이식된 레볼칩이 반응하며, 중고 스마트폰 화면에 알림 창이 떴다.


[전투 감지 – 레벨 1 등록 승인 / 비공식 보상 – 프리덤 5 지급]


화면 속에 떠오른 이름 ‘라운’은 또렷하게 박혀 있었고, 그 단어가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울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이제부터 자신은, 시스템이 말하는 ‘시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석현의 팔에서 떨어져 있던 등록 밴드를 조심스럽게 주워 들었다.
그 안엔 둘이 주고받은 짧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겁나면 같이 가. 무서워도 같이 있어.]
그 문장을 본 순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통곡도 아니었고, 소리도 작았지만,
그는 이제까지 울지 못한 모든 순간을 그 눈물에 실어 흘려보냈다.
그러나 그 울음은 곧 손에 든 파이프의 무게로 전환되었다.

“이번엔 내가 앞에 설 거야.”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서진 드론 하나가 그 앞에 있었고, 렌즈는 아직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아무 말 없이, 곧장 내리쳤다.

드론은 부서지며 철판 조각처럼 나뒹굴었고, 시스템에서 작게 보상음이 울렸다.
그 소리는 묘하게 슬펐고, 너무도 조용해서 오히려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
뒤편에서 몇몇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 도망 안 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앞에 설게.”

그 말은 위로도, 약속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두려움을 행동으로 바꾸는 중이었다.

그는 파이프를 어깨에 메고, 부서진 창문 틈을 넘어섰다.
불타는 도시의 하늘이 그의 앞에 열려 있었고, 연기와 화염, 쓰러진 건물들로 가득한 폐허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손목에 떠오른 ‘레벨 1’이라는 숫자를 잠시 바라봤다.
그것은 이제 그의 책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 등록되지도 않았고, 그가 유일하게 ‘인식된 존재’였다.

그는 그 권리를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원하는 건 다음 단계가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다시 만나는 거야."
그 말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었다.

그는 황성 남부 폐허를 따라 이동했다.
드론이 날아올 땐 아이들에게 손짓했고, 누워있는 이의 손을 잡아 옮겨 주었으며,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방식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경비 루틴을 만들었다.

그의 손목에 떠 있는 레벨 1 아이콘은 점점 닳아갔지만, 그는 끝까지 신호를 유지했다.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 그가 여전히 누군가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

밤이 되자 공습 경고음이 다시 울렸고,
그는 가장 작은 아이 둘을 안고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만히 속삭였다.
“아빠가 올 거야. 엄마도. 반드시.”

그 말은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시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로미 – 아무도 없는 열차에서 피어난 치유]


황성 외곽의 폐선 위에 정차한 열차는 전기가 끊겨 어둠에 잠겨 있었고, 안개는 차창 너머 잿빛 풍경을 가득 덮어 마치 세상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차 안은 조용했고, 그 적막을 깨는 건 간헐적인 철 구조물의 삐걱이는 마찰음뿐이었다.
로미는 객실 한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엔 엄마가 아침에 손수 싸준 도시락 가방이 놓여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펼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엄마의 품 안에 있었던 그 조그만 손은, 지금 차가운 바닥 위를 더듬고 있었다.

열차는 황급히 정차한 뒤로 한 번도 다시 움직이지 않았고, 동행했던 어른들은 혼란 속에 전부 내렸거나 실종된 상태였다.
남겨진 건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아이들과 식량 몇 봉지, 그리고 희미한 희망뿐이었다.
로미는 가장 가까이 누워 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고, 붉게 번진 피는 이미 시트를 물들였다.

그녀는 조용히 기어가 그 아이 곁에 앉았고, 손끝을 상처 위에 올렸다.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나아질 거야,”
그 말은 위로였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에게 하는 기도 같기도 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목 안쪽이 미묘하게 따뜻해졌고, 피부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열차 벽면에 설치된 스마트 패널이 자동으로 활성화되며 경고음과 함께 새로운 창을 띄웠다.


[감응 계열 능력 발현 – 레벨 1 등록 완료 / 보상 지급: 프리덤 1]


로미는 그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면 속에 떠오른 ‘로미’라는 이름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패널에 떠 있는 이름을 눌렀고, 순간적으로 손끝에서 파동처럼 퍼져 나간 온기가 부상자의 숨소리를 가늘게 안정시켰다.

아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걷히고, 경직되었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자 로미는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감쌌다.
다른 아이들이 조심스레 다가오며 물었다.
“너… 의사야?”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엄마가 말했어. 아플 땐 따뜻한 손이 먼저 필요하다고.”

그 말은 단순했지만,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먼지가 그녀의 머리에 소복이 내려앉았지만, 로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창밖의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도시로부터 들려오는 굉음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가진 손의 힘이 단순히 장난이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따뜻한 도구라는 사실을.

그 손은, 지금 이 순간 한 생명을 살려냈고,
그 작은 손 하나가 이 열차 안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엄마… 나, 지금… 사람을 고쳤어.”
그녀는 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둘러싸며 말했다.
“우리, 너만 믿을게.”
그 말은 어른이 해줄 법한 말이었지만,
아이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이 지금 로미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내 아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나가야 해.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
말은 떨렸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로미는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은 묵묵히 끄덕였고, 그중 몇 명은 부상자를 들 수 있도록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열차 문을 향해 걸었다.

한 발 한 발이 무거웠지만,
그것은 희망을 옮기는 발걸음이었다.
열차 밖은 여전히 위험했고, 드론이 떠돌았으며, 도시 시스템은 마비 상태였지만,
그녀는 손목의 레볼칩이 깜빡이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괜찮아. 나, 이제 혼자 아니야.”

그 말은 모두에게 들려줄 수 없는 고백이자 선언이었다.
어린아이였던 그녀는,
이제 리더였다.
그리고 그 리더는,
무기를 들지 않고 사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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