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1억 개 – 소주병이 쌓아 올린 위로의 높이
그날도 퇴근길이었다.
비닐봉지엔 반찬 두 개,
그리고 초록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오늘은 하나만 마셔야지”
누구에게 말한 건지도 모를
그 혼잣말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습관처럼 나왔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팔린 소주는 약 31억 병.
말 그대로 ‘억’ 단위의 병이 열리고,
비워지고, 다시 쌓인다.
1인당으로 계산하면, 연간 약 60병.
일주일에 한 병씩.
어떤 사람은 혼자 마시고,
어떤 사람은 셋이 나눠 마신다.
하지만 그 병 속에 담긴 건
대부분 술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하루다.
한국 사회에서 소주는 유난히 특별하다.
축하할 때도, 기념할 때도,
실직했을 때도, 이별했을 때도
같은 잔을 들고 같은 색을 삼킨다.
이건 단순한 술이 아니다.
이건 ‘표현 대신의 선택지’였다.
2024년, 소주는 하루에
약 8,500만 병 꼴로 팔렸다.
하이트진로의 ‘진로’는 초당 12병이 팔린다.
이쯤 되면 국민이 마시는 게 아니라,
국가가 마시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한국 소주는 ‘K-위로’로 팔리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1년 새 판매량이 350%나 늘었고,
미국과 일본에서도
‘감정 있는 술’로 받아들여진다.
위로가 필요한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냥 싸니까 마시는 거지.”
하지만 싸서 마신다는 건,
그만큼 값싼 위로밖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소주병 하나에 담긴 건 알코올 17도지만,
그보다 더 센 건 하루치의 피로, 말 못 한 분노,
그리고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한 속마음이다.
병은 매일 비워지지만,
속은 비워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매년 31억 병의 소주가 팔린다.
그 숫자는 단순히 병 개수를 뜻하지 않는다.
그건 감정이 쌓이는 속도다.
말하지 못한 위로가 탑처럼 쌓이는 구조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잠시 지우는 방식이다.
음주 문제를 논하기 전에,
왜 이렇게까지 마셔야 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소주는 사라졌다.
술기운도, 비틀거림도, 다음 날이면 대부분 날아간다.
하지만 그날의 마음은 남는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고백,
‘나 오늘 좀 힘들었어’라고 말하지 못한 슬픔.
31억 개의 소주병이 보여주는 건
대한민국 사람들이
얼마나 마셨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참고 있었는가, 그 숫자다.
그래서 이 숫자가 말해주는 건 분명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할 곳이 없다.”
우리는 소주를 마신 게 아니라,
표현을 삼켰다.
그래서 오늘도 병은 비워지고, 마음은 더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