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잔을 추억하며

비움의 미학

by 카타

나는 물건을 비우는 것에 서툰 사람이다.


지금 당장 필요는 없지만 언젠가 사용할 것만 같다는 이유, 내 취향과 상관없이 집에 입성했지만 꽤 아직까지 제 쓸모를 다하지 못한 이유로 꽤 많은 물건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서랍 속에서 몇 년을 잠들어 있으니 이래나 저래나 제 효용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게다가 새로운 신입이 하나둘씩 공간을 차지하고 들어온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건 하나를 비울라면 결심이 서기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관리되지 않는 물건들은 공간과 에너지를 소모시키니 굳은 마음을 먹고 비우기로 결심한다. 이 결심이란 녀석은 이미 반복하기를 여러 차례지만 그래도 한번에서 끝난 것보다 두 번, 세번 반복한 결심이니 이쯤되면 "지속가능한" 결심이라는 생각에 나름의 위안을.


무엇보다 '비움'에 있어서 가장 고난도 작업은 추억이 담긴 물건을 비울 때다. 오래 전 읽었던 책들을 비우기로 결심했을 땐 얼마나 힘들었나. 모든 책을 한번씩 재독하고 버리겠다는 결심이 더해져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어릴 때 썼던 일기들과 시간너머로 사라진 인연들과 나눈 쪽지와 편지들은 아직 비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우연한(?) 기회로 비움의 기회가 찾아올 때도 있다. 며칠 전 책꽂이 상단에 짱(!)박아 두었던 코르크 마개와 컵홀더를 정리했다. 반려묘 중 한 녀석이 드디어 책꽂이 상단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쌓였던 먼지를 걷어내고(물론 그 중 일부는 사방으로 흩어져 나의 알러지를 자극했다.) 지난 추억과 재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족들과 함께 마셨던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 2012년을 시작으로 2015년부터 202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마신 와인의 코르크 마개들이다. (그 중에는 꽤 많은 녀석들이 내가 적어둔 날짜를 여태 품에 안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코르크 마개는 꼭 모아보고 싶은 것 중 하나였을 만큼 코르크 마개에 담긴 감성을 좋아한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병마개 그 이상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감성'이 담긴 물건으로 와닿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고지고 살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비우기로 결심했다.


뒤적뒤적하다가 종류가 다른 녀석들을 몇 가지 모아보았다. 함께 마신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코끝이 시큰시큰해지기 시작한다. 매번 추억이 담긴 물건을 비우는데 실패하는 이유다. 그래도 이번에는 약해지지 않을거라며 마음을 굳게 먹고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한번 더 뒤적뒤적. 결국 다섯개의 코르크마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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