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과 언어의 공생 관계

메이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by 좀머

아픈 몸은 운신의 폭을 제한한다. 고통은 주관의 영역이라 누구에게 이해받기도 곤란한 지점이 있다. 이 고통의 파괴력은 표현하는 일부터가 ‘일’이다. 누구나 아프지만, 누군가는 더 많이 아프고, 더 오래 아프기 때문이다. 끔찍한 두통을 겪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두통의 고통은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터질 것 같은 머리통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사람과 그깟 머리 좀 아픈 것 가지고 죽는시늉을 하는 사람의 차이가 그렇다. 내가 내려가 본 심해가 수심 100미터라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압도 수심 100미터의 것일 테니까. 각자의 심해가 다른데 나의 고통이 전적으로 이해되길 바라는 마음도, 누군가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는 태도도 모두 어불성설일 수밖에.



편두통을 오래 앓아온 나는 몇 년째 편두통 발작 기록을 써오고 있다. 발작 기록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면 발작 전후로 내가 한 일이나 먹은 음식, 상황, 증상 등을 간략히 적고 어떤 진통제를 몇 시에 몇 알 복용했는지를 함께 적어두는 식이다. 편두통 발작 요인은 사람마다 다르고 또 다양한데, 나의 요인이 무엇인지 간절히 알고 싶기 때문이다. 아픈 것은 고통스럽고 힘드니까, 피하고 싶으니까. 그러다 편두통 환자-작가 민윤이 쓴 《편두통, 한없이 예민한 나의 친구》라는 책을 읽었을 때, 비록 진통제로 통제가 가능한 비교적 경증의 두통이라도 티나지 않아 더 곤욕스러운 이 고통을 아는 사람, 나보다 더 심한 중증의 편두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 그가 분투해 온 두통의 날들, 그 모든 걸 재현한 섬세하고 성실한 언어가 어쩐지 위로가 됐다. 혼자 앓고 마는 고통은 나 혼자만의 것이지만 애써 기록하고 표현한 경험은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는 어느 날 별안간 만성피로증후군 환자가 된 작가 메이가 아픈 몸의 주인으로서, 아프다는 것이 그에게 미친 모든 영향에 대해, 아픈 몸으로 살아갈 때 생기는 세상과의 작용과 별일들에 대해, 죽은 이들이 어떻게 그를 심연 속에서 끄집어내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특히 버지니아 울프에게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마침내 뭍으로 올라와 한결 편한 숨을 쉴 수 있게 된 지금의 영광을 버지니아 울프에게 돌리는 것도 같다. 그가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공식/비공식적인 모든 기록들을 탐독했던 이유는 내가 편두통 에세이를 찾아 읽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공감받고 싶을 때 공감해 줄 이를 찾는 ‘능동성’이 거기에 있다. "거울이 되어주는 말과 이야기" 속에서 나의 이면을 응시하려는 용기이자, 좁고 깊은 우물 안에서 벗어나려는 개구리의 멋진 뒷발차기를 목도하는 순간이다. 질병과 아픔과 그 밖의 온갖 모난 것들의 폭풍 속에서도 기어코 삶을 지켜내는 힘들은 대개 ‘말과 이야기’에 있는 것 같다. ‘아픈 몸’과 ‘언어’의 아름다운 공생 관계가 아직도 마음속 희부연 빛으로 남아있다.








P67 거울이 되어주는 말과 이야기 없이는 자신이 겪은 일을 그 경험의 밖에서 볼 수 없다. 다름뿐 아니라 같음을 비춰보며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안다.


P212 의학적 처치 때문이든 주변 사람들 때문이든 병 자체 때문이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침입당하는 느낌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소통에 목마른 투병인에게, 사적으로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의 말을 듣거나 듣지 않길 선택할 수 있다는 독서의 조건은 아플 때 책을 오히려 가장 가깝고 편한 친구로 만든다. 당신은 이 글도 덮어버릴 수 있다. 이 사실이 내게 계속 쓸 용기를 준다.


P233 우리를 낫게 하는 말씀은 신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 쓰여 있는 것, 저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치유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미 구원의 내재성을 말해준다. 말은 세상을 초월한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오기 때문이다. 예수도 얘기하지 않았던가. “천국은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