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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구무언 Nov 08. 2021

텅 빈 장례식장

손님 없는 장례식

경찰서에서 나오다 주저앉은 어머니를 부축하며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병원 장례식장을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결정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장례식장 사이즈, 제삿밥은 몇 번 올릴지, 영정사진은 어떻게 할지, 꽃은 어떻게 할지 수 없이 많은 선택이 강요되었다. 동생이 떠난 마당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떄려치라고 하고 싶다가도 동생 가는 길을 허투루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상조회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결정을 짓고 영안실로 혼자 향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배정된 102호 장례식장 한편에 지쳐 쓰러져 게셨다. 영안실에 도착하고 그곳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차가워 보이는 은빛 기구가 보였다. 그리고 드르륵 소리와 함께 동생을 마주했다.


동생은 마치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그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더 이상 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참을 수 없었다. 오른쪽 이마 위로 검붉게 말라붙은 피가 보였다. 장례식장 분께 부모님께서 충격받으시지 않게 제발 잘 수습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다시 영정사진을 위해서 사진사를 만나야 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동생이기에 영정사진으로 쓸만한 사진이 없었다. 카카오톡이나 SNS에도 자신의 사진을 일체 올리지 않는 타입이었기에 사진을 찾기도 어려웠다. 겨우겨우 5년 전쯤 찍은 가족사진에서 얼굴을 따와서 영정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 액자를 어떻게 할지 또한 선택의 기로였다. 돈을 아끼지 않고 좋은 걸로 해달라고 했다. 동생의 빈소가 이제야 겨우 다 마무리되었다.


꽃을 선택하고 빈소를 어떻게 꾸밀지 선택하며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는 생각은 이 돈을 동생에게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후회였다. 동생은 자신의 앞으로 있던 어머니가 들어준 주택청약 적금에는 손도 대지 않고 떠나갔다. 경제적 곤궁함 속에서도 내가 카카오로 보내준 돈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떠나버린 동생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더 답답했다. 답답한 자기만족인 줄 알면서도 동생에게 상을 올리고 술을 올렸다. 천주교 신자였던 동생이지만 부산에 내려와서는 어찌 지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기도를 드리고 절도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살아 있을 때 잘해줄 것을 조금만 더 이해해볼 것을 후회뿐만이 남는 첫날이었다. 그리고 빈소 102호에 상주로 내 이름이 올라갔다. 손님은 일체 받지 않기로 했다. 이미 지친 부모님께서는 외부 손님을 받으실 여력이 없었다. 세 식구의 3일장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빈소에 쓰러지셔 울다가 깨다를 반복하셨다. 나는 죽과 미음을 배달시켰지만 전혀 드시지를 못했다. 물조차도 넘기시지 못했다. 밤이 깊고 찬 공기를 잠시 쐐고는 나는 밥을 사 먹었다. 나마저도 쓰러지면 이 장례를 끝낼 사람이 없었다. 부추를 넣은 돼지국밥과 깍두기를 바득바득 씹으며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악물고 씹어 넘기며 버텨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중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검사의 지휘서가 도착하였고 검시 확인서를 받아가라는 연락이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 2층에서 형사에게 검시 확인서를 받고 나왔다. 이 서류가 있어야 화장 절차를 밟을 수 있다고 했다. 상조회에 전달해 주고 이틀 후 일정을 잡아야 했다. 겨우 필요한 절차를 마치고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한 캔을 샀다. 그리고 편의점 앞에 주저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맨 정신으로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이 슬픔을 전할 길 없고 버티기 힘들었다. 길바닥에 앉아서 미친 사람처럼 엉엉 울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간간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눈물이 계속 나왔다. 한참을 울고 또 울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택시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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