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온 최 노인은 평소 즐겨 찾던 오래 된 공원으로 향했다.
때마침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하필 무슨 비가 오는 거야······.”
차가운 빗방울이 살갗에 닿자, 파킨슨병이 갉아먹은 온몸의 근육이 쇳덩이처럼 굳어가기 시작했다.
다리를 끌던 최 노인이 결국 중심을 잃고 젖은 흙바닥 위로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내가 네 몸에 자유를 줄까?”
어디선가 빗소리를 타고 눅눅하고 기이한 목소리가 최 노인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내가 네 몸에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있어. 멀쩡한 몸뚱이를 가졌다고 노인을 짐짝 취급하는 이 오만한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저주할 수 있게 해줄게.”
“몸만 자유로워지면··· 그 모든 것을 부숴버릴 수 있어.”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하수구 냄새가 코끝을 훅 끼쳤다.
최 노인의 탁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굳어버린 육체에 갇혀 짐승처럼 헐떡이던 그에게,
'몸의 자유'라는 단어는 거부할 수 없는 구원과도 같았다.
자유만 얻는다면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비참하게 무시당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 내 몸에 자유를 줘. 그리고 온전히 내 몸으로 이 세상을 짓밟고 느끼게 해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끔찍한 변화가 시작됐다.
종아리부터 시퍼렇게 솟아오른 핏줄들이 마치 수십 마리의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팽창했다.
피부 밑을 헤집는 미끈덩하고 거대한 감각이 허벅지를 타고, 허리를 감아올라, 순식간에 심장을 강하게 옥죄었다.
“크아아아아아악!”
기괴하고 처절한 비명과 함께, 최 노인의 거대한 몸이 질척이는 진흙탕 위로 거칠게 꺾여 내렸다.
도심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오래된 공원은 꼭 할머니 자신을 닮아 있었다.
평소 자주 찾던, 칠이 벗겨진 목재 벤치에 주저앉은 그녀는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무릎 위로 깊게 파인 주름진 손이 포개졌다.
거칠어진 손등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할머니는, 언제 이토록 많은 시간이 자신을 뚫고 지나가 버렸는지 아득해졌다.
"장판 쪼가리 하나 내 손으로 못 치워서···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꼬. 등신같이 늙기만 했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인네······."
갈라진 입술을 비집고 나온 자조 섞인 목소리는 허공에 채 닿기도 전에 바스러졌다.
예전의 그녀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 꼿꼿한 사람이었다.
고장 난 텔레비전을 담벼락에 내놓으면 그만이던 시절, 이웃끼리 품을 내어 돕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 폐기물 스티커 한 장을 얻기 위해,
손바닥만 한 기계 앞에서 알지도 못하는 평수와 규격을 더듬거리며 두 시간이나 굽신거려야 했다.
똑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할 때마다 돌아오던 구청 직원의 한숨 소리.
젊은이들이 단숨에 해치우는 일 앞에서 그녀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세상은 잔인할 만큼 빠르게 변하는데, 그 누구도 늙은 그녀에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깊고 무거운 자괴감이 쩍쩍 갈라진 발뒤꿈치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완전히 퇴물이구나······.'
그 끔찍한 확신은 단순한 서러움이 아니었다.
텅 빈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끈적한 녹조가 차오르는 듯한, 지독하게 눅눅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완벽히 도태되었다는 뼈저린 절망이 그녀의 남은 자존감을 빈틈없이 갉아먹었다.
그때였다. 칠이 벗겨진 나무 벤치 아래, 짙게 깔린 그림자 속에서 서늘한 속삭임이 귓가에 엉겨 붙었다.
"내가 부수게 해 줘. 내가 널 도와줄게."
할머니의 고개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그 목소리는 기괴했지만, 제안만큼은 지독하게 달콤했다.
"빠르게 도망치는 이 세상의 발목을 꺾어버리면 돼. 그럼 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할멈. 당신이 알던 그 다정한 세상으로. 네가 다시 쓸모 있어지는 그 시간으로. 내가 부수게 해 줘. 기꺼이 도와줄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텅 비어버린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사람에 대한, 그리고 온전하게 존중받던 시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 일고 있었다.
그 한마디가 다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쥐여 주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폐기물 취급을 하는 이 세상에서,
오직 저 낯선 목소리만이 자신을 똑바로 알아주고 구원의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릎 위에 포개져 있던 앙상한 손가락에 경련이 일었다.
굳게 닫혀 있던 주름진 입술이 제멋대로 파르르 떨리더니, 메마른 목구멍에서 단호하고도 서늘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부숴버려. 다 부수고, 예전으로 돌려놔 줘. 이 숨 막히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예전 세상이 더 좋았으니까, 다 같이 돌아가는 거야."
그녀는 홀린 듯 긍정의 대답을 토해냈다.
그 순간, 할머니의 헐떡이던 숨이 일순간 멎었다.
갑자기 고개가 벤치 등받이 뒤로 기괴하게 꺾이더니, 탁한 눈동자가 위로 뒤집히며 허연 흰자위만이 번들거렸다.
마치 아가리를 벌린 짐승처럼 벤치 밑의 어둠이 기괴하게 팽창했다.
어둠 속에서 차갑고 미끌거리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할머니의 앙상한 발목을 타고 뱀처럼 감겨 오르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굵은 수십 마리의 지렁이 떼였다. 할머니는 발목을 파고드는 그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완벽한 잠식의 시작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오래된 공원.
우연히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의 낡은 벤치 밑에서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어둠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할머니의 앙상한 발목을 타고 오르던 지렁이 떼는, 어느새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은 뻣뻣한 할아버지의 몸까지 무자비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으나 결국 세상의 속도에 짓눌려버린 두 사람이었다.
거대한 우울을 양분 삼아 팽창한 어둠은 급기야 공원 위 하늘마저 기괴한 검녹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던 푸른 하늘이 마치 썩은 늪처럼 기분 나쁜 녹빛으로 일렁이며 도심의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낡은 사무실.
“···먹혔나 보군.”
블라인드 틈새로 창밖을 응시하던 김씨의 미간이 좁아졌다.
평소의 흐릿한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기운을 읽어내는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하늘을 흉흉하게 뒤덮은 거대한 녹색 안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김씨, 왜 그래? 어디 또 먹힌 거야?"
한쪽 구석에서 소금을 손질하던 권씨가 퉁명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김씨는 대답 대신 턱 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빌딩 숲 너머,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짙은 녹색 하늘을 확인한 장씨와 권씨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저건 평소에 보던 색깔이 아니야. 분노를 삼킨 사람들이 최소 두 명··· 그 이상의 지독한 절망에 엉겨 붙은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끊어내지 않으면 일대가 통째로 잠식당하겠어."
김씨의 다급한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구의 권씨가 새하얀 소금을 가득 담은 무거운 가마니를 단숨에 어깨에 둘러멨다.
장씨 역시 융단으로 정성스레 감싼 세월 묻은 옹기 항아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빨리 차에 시동 걸어! 늦으면 공원 일대가 쑥대밭이 될 거야."
권씨는 사무실의 문을 부서질 듯 거칠게 어깨로 밀어젖혔다.
곧이어 세 사람을 태운 낡은 트럭은 타이어 타는 냄새를 짙게 풍기며,
모든 빛을 집어삼키고 있는 저 불길한 녹색 하늘의 중심부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도심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오래된 공원.
짙은 녹색으로 썩어들어간 하늘 아래, 두 노인은 수만 마리의 지렁이가 엮어낸,
끈적한 점액질로 뒤덮인 축축하고 흉측한 거대한 검은 고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벤치 밑에서 기어 나오는 축축한 지렁이 떼는 이미 그들의 무릎을 지나 가슴팍까지 미친 듯이 파고들고 있었다.
끼기기기긱— 쾅!
소름 끼치는 정적을 찢고, 낡은 차 한 대가 공원 입구의 보도블록을 부서질 듯 들이받으며 멈춰 섰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덜컹거리는 차 문을 걷어차듯 열고 세 남자가 녹색 안개 속으로 뛰어내렸다.
"늦지 않았겠지? 하늘빛을 보니 둘 다 심장까지 먹힌 것 같아! 할머니 쪽이 훨씬 깊어!"
가장 먼저 튀어나간 김씨가 흉측한 살덩어리처럼 변해버린 두 노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노인들의 몸을 파먹어 들어가는 수천 가닥의 기운이 끔찍한 보랏빛으로 얽혀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거구의 권씨가 어깨에 멨던 무거운 가마니를 쿵, 소리 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켜, 내가 길부터 뚫는다!"
권씨는 망설임 없이 가마니의 매듭을 뜯어내고 양손 가득 무언가를 퍼 올렸다.
새하얀 소금은 권씨의 거친 손에 쥐어지자마자 핏빛처럼 붉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몸을 칭칭 감고 있던 거대한 지렁이 떼가 불청객의 등장에 분노한 듯 일제히 대가리를 치켜들고 쉿쉿거렸다.
"어딜 감히 노인네들 몸뚱이에 늘어붙어!"
권씨의 굵은 팔뚝이 허공을 매섭게 갈랐다. 붉은 소금 결정들이 짙은 녹색 공기를 찢으며 산탄총처럼 흩뿌려졌다.
타다다닥—! 콰아앙!
소금 알갱이들이 미끌거리는 지렁이 떼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귀를 찢는 기괴한 비명과 함께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소금이 닿은 자리마다 맹렬한 붉은 불꽃이 터져 오르며, 벤치 주위에 똬리를 틀고 있던 어둠을 자비 없이 태워버렸다.
악취 나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할머니의 목을 조이려던 굵은 지렁이 몇 마리가 숯처럼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거대한 덩어리가 뜯겨 나가며, 노인들을 옥죄던 지렁이들이 느슨해지자 찰나의 틈이 생겼다.
"장씨, 틈이 생겼어! 지금 들어가야 해. 놈들이 다시 살을 메우기 전에 얼른 부어버려. 당장 씻어내자고!"
김씨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권씨의 등 뒤에서 숨을 고르던 장씨가 땅을 박차고 나갔다.
매캐한 소금 연기와 지렁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녹색 안개 속을 뚫고, 그는 노인들이 웅크린 고치의 중심부로 단숨에 파고들었다.
끊어졌던 지렁이 떼가 다시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빈틈을 메우려던 찰나였다.
장씨는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있던 옹기 항아리의 융단을 걷어냈다.
장씨의 굳은살 박인 손이 뚜껑을 열어젖혔다.
수백 년간 햇빛과 바람을 머금고 대대의 시간 속에서 발효된 검은 간장의 향이었다.
썩은 늪처럼 진동하던 지렁이들의 악취가 그 장엄한 향기에 눌려 흔적도 없이 바스라졌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숨을 쉬십시오."
장씨가 항아리를 살짝 기울였다.
칠흑같이 어두우면서도 영롱한 빛을 품은 흑갈색의 액체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가슴팍
가장 두꺼운 점액질이 엉겨 붙어 있는 심장부를 향해 쏟아졌다.
"치이이이익"
간장이 닿는 순간, 기괴한 비명조차 터지지 않았다.
살을 파고들며 노인들을 옥죄된 축축한 지렁이 떼와 끈적한 어둠이 마치 뜨거운 물에 닿는 눈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맹렬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