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제발 내 상상 속 모습이기를
기다렸던 입주일이다. 아침 일찍 새로운 호스트 S의 문자를 받았다. 장문에 한 번 놀라고, 문자가 이렇게 시끌벅적 할 수도 있구나 두 번 놀랐다. 하긴 빨간머리앤을 읽으면서는 글씨를 읽는데 귀가 아픈 경험을 했으니까. 아무튼 그녀는 무척 발랄한 사람 같았는데 사실 블로그 글에서 받았던 느낌은 대부분 감성적이고 때때로 우울한 분위기여서 같은 사람이 맞나? 싶기도 했다. 오늘 우리가 만나 무엇을 할 것인지 신나게 설명한 그녀는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S의 픽업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짐을 챙겨 건물 1층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오늘 내 짐을 옮겨주고 다시 곧바로 나를 태워 움직일 예정이라고 했다. 육지에 사는 친한 친구가 마침 놀러오기로 한 날이라 더 신났다는 그녀는 천진한 아이 같았다. 실제로 만나면 어떨까? 막상 눈앞에 나타난 그녀는 반갑게 웃으며 다가오다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선 뒤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봤다. 최대한 티나지 않게 하고 싶은 듯 눈동자만 천천히 움직였지만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훑는 시선이 선명히 느껴졌다. 뭐지? 싶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건 별 일이 아니어야 했다. 나는 이제 돌아갈 집이 없으니까. 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섬은 내게 벼랑 끝이었다.
S는 곧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내 짐을 차에 같이 실어주었다. 오늘 새해맞이 사주를 보러 가기로 했기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숙소에 도착해 한 번 같이 짐을 날라주고는 감감무소식이던 그녀는 내가 마지막 짐을 올리고 있을 때 방 안에서 슥 나타나서 도저히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엘레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4층이었다. 나도 내 짐이 버거웠으므로 그녀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멋쩍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자 그녀는 다시 생기를 찾은 듯 활짝 웃으며 짐은 이따 풀고 일단 나가자고 했다.
모인 사람들은 S의 차를 다같이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조수석에는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친구가 타야 한다고 했다. 4인승 차에 이미 차에 탈 사람이 네 명이었지만 별 수 없이 세 명이 뒷좌석에 낑겨 앉았다. 원래도 분위기를 주도하며 이야기가 끊기지 않도록 하던 S는 자신의 친구가 차에 타자 더욱 텐션이 올라가 목소리까지 더 하이톤이 됐다. 나의 에너지는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뉴페이스인 나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려는 S의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부분의 대답을 대신했다.
사주를 봐주는 곳은 일반 가정집 같았다. 방 안에 일행이 모두 같이 들어갈 땐 어린 아이들처럼 꺅꺅거렸다. S가 탁자 앞에 앉고 나머지는 뒤에 앉아서 그의 결과를 함께 들었다. 방청객처럼 적당한 호응을 넣어가면서. 자신의 점괘를 뒤에 모여앉은 여럿이 듣는 걸 전혀 개의치 않는 S가 신기했다. 오히려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호응에 한층 더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같았다. 게다가 다른 일행들도 사주풀이를 들으러 온 줄 알았는데 그저 S의 결과를 다같이 듣기 위한 자리였다. 물론 그 곳에서 나온 뒤 맛집에도 가고 낑겨 앉았지만 드라이브를 하긴 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풀어야 할 짐이 가득인 나는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부엌에서 S와 친구의 말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짐을 정리하면서는 신경이 덜 쓰이다가 정리를 끝내고 침대에 드러누우니 꽤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가서 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니 알은체를 해주었다. 지금 케이크를 먹고 있었는데 같이 먹겠느냐고.
식탁의 한쪽 면은 벽에 바싹 붙여져 있었고 벽에는 호스트가 직접 그린 관광코스 지도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내 눈높이가 그 지도와 얼추 맞게 되자 S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신나게 자랑을 시작했다. 본인이 그린 것이고, 여기는 뭐가 유명하고, 저기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고, 여기는 숨겨진 명소이고… 아~. 아 그렇구나~. 추임새를 넣어가며 장단을 맞추었지만 사실 명소에 대해 큰 호기심은 없었다. 내게는 도피처가 필요했지 여행이 필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제주에서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서 그녀의 임무 혹은 게스트를 위한 특별 서비스 중 하나는 바로 명소 소개하기인 듯 했다. 별도의 비용없이 자신의 차로 이동시켜주며 가이드 해주기도 했다. 내게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S는 이 섬을 많이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단순히 그게 전부였으면 좋았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