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이 없다는 사실

15회 이제는 내가 나를 소개해야 한다

by 베풂과 행복

15일 차. 명함이 없다는 사실


업계 지인들과 골프 모임이 있었습니다. 두 분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이고 한 분은 이름만 아는 분이었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그분이 먼저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입니다.”


저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명함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입니다. 리멤버(앱)로 명함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말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하지만 명함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명함이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저에게 와닿았습니다. 명함을 건네지 못한 순간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뒤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제 이름 앞에 붙어 있던 말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비슷한 상황은 며칠 전에도 있었습니다. 친척들과 골프를 쳤습니다. 그때는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날씨는 화창했고 공기는 맑았지만, 제 마음은 먹구름이 잔뜩 낀 상태였습니다. 공도 제대로 맞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조금 달랐습니다. 207미터 파3 홀에서 버디를 했습니다. 동반자들도 웃었고, 저도 웃었습니다. 오랜만에 명랑골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식사를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두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에 제가 계약만료가 됐습니다.”

“지금은 고문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백수입니다.”


말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숨기지도,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회사에 있을 때는 직함이 저를 대신 소개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저 자신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먼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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