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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07. 2024

작가의 귀

한 쌍의 귀가 작가를 만든다

저에겐 오랜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창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저에겐 창작에 있어 든든한 지원군 중 하나입니다.

이 친구는 놀라울 만큼 명석해서,

제가 이 친구와 여러 사안을 두고 여지껏 100번쯤 토론을 했습니다만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제가 전부 패배했습니다.

패배의 쓴 잔을 마실 때마다 속으론 '재수없는 놈'이라며 읊조리긴 했습니다만,

동시에 그 지식의 폭과 깊이에 매번 감탄하곤 했습니다.

이 친구는 논리가 없는 감정적 호소를 끔찍하게 싫어하며,

근거가 없는 주장, 검증되지 않은 사실도 그만큼 싫어합니다.

이 친구를 그리 잘 알지 못하던 시절에,

저는 이 인간이 냉혈동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세상에 만연한 비극을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었으며,

그 비극을 바로잡기 위해 이성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믿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 친구가 휘두르는 견고한 논리와 이성의 칼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연약한 가슴에서 뻗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혹은 <소년심판>의 심은석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친구와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보러 한국영상자료원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시드니 루멧이 연출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각색해서 만들어진 영화로,

아버지를 죽인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소년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논하는 배심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99%가 좁다란 배심원실에서만 진행됩니다.

시민의 의무를 다하라는 통보를 받고 배심원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에 그리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유죄이니 얼른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가자며 투표를 합니다.

만장일치로 유죄가 될 줄 알았지만, 단 한 장의 무죄표가 나옵니다.

무죄표를 던진 8번 배심원은 말합니다.

"무죄라고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무죄일 가능성이 있으니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는 겁니다"

8번은 집요한 끈기와 철저한 이성으로 '나태한 정의'를 하나하나 꺾어 나갑니다.

개중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유죄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8번은 기어코 허점을 찾아내 유죄 논리를 굴복시킵니다.

8번이 살인자 소년의 친척이라거나 하는 반전은 없습니다.

그는 '진실에 대한 시민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결국 영화의 종장에 이르러 1:11이었던 투표 결과는 12:0으로 뒤집어집니다.

'그는 살인범일 것이다'라는 정서적 진실에 매몰되지 않고,

'살인범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이성적 결과를 도출한 사람들.

물론 그들의 무죄 평결이 소년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죄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여기엔 법치주의가 추구해야 할 무죄추정의 원칙과

민주사회의 시민이 추구해야 할 성실한 의무 이행이 있습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감정론에 매몰되기 쉬운 법정극 장르에서 찾아보기 드문 걸작입니다.

이 영화를 벤치마킹해서 만들어진 한국영화 <배심원들>과 비교해보면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보여준 이성적 성취가 더욱 빛납니다.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선 친구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오랜 침묵 끝에 저에게 "너도 나중에 이런 영화 만들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웃으며 "응, 못해"라고 답했습니다.

창작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친구는 영화나 드라마 그 자체에 대해선 무지합니다.

다만 무지하다는 것은 지식이 없다는 것일 뿐,

그것을 이해하는 지혜가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대학생 시절 집에서 함께 비디오를 보던 어느날,

이 친구는 갑자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 컷은 누구의 시점이야?"

그 질문에 저는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컷은 1인칭 관찰자적 시점을 유지하던 영화가

갑자기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넘어간 컷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에 가서 이론적으로 배워서 알았던 영화의 '시점' 개념을,

그 친구는 그저 감각을 통해 발견해낸 것입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저는 잘 단련된 지성은

대상을 감각적으로 이해해낼 지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느덧 19년 지기가 된 이 친구를 저는 요즘도 많이 괴롭힙니다.

새로운 아이템이나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제가 조잘조잘 떠들어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는 이젠 포기하고 가만히 들어줍니다.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의견을 던져 저를 당황시킵니다.

그 친구는 이야기의 허점을 놀랍도록 잘 찾아냅니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변명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필시 그 허점이란, 대본화 과정에서 실수했을 때 큰 구멍이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친구의 지적을 참고해서 저는 대본화 과정의 설득력에 공을 들이거나,

혹은 사건의 전개 자체를 갈아끼웁니다.

다만 이 친구는 결코 시나리오나 대본을 읽어주지는 않습니다.

"내가 이걸 미리 읽으면 나중에 만들어진걸 볼 때 재미가 없잖아."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내 이야기가, 언젠간 반드시 만들어질 거라고 믿어주고 있구나.


그동안 숱한 작업을 통해 숱한 업계인들의 피드백을 들으면서,

저는 어떤 말은 동의했고 어떤 말은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동의하지 못한 말들 중에선 '틀린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맞는 말이지만 내 이야기엔 적합치 않은 의견'도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명작이라도 나와는 맞지 않는 드라마가 있는 것처럼,

결국 내 이야기에 적합한 말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 나와 세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함께 좋아하는 드라마를 두고 그 드라마가 얼마나 위대한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서로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서 그것이 반드시 만들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는 것.

그런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축복일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어렵지만,

그런 이야기를 평가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평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이야기에 맞는 정확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좋은 이야기를 쓰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맞는 말을 하는 입만큼, 맞는 말을 들어줄 귀도 드문 법이니까요.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전기영화 <트럼보>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당대의 대스타 커크 더글러스는 트럼보를 찾아와 300페이지는 족히 될 시나리오를 내밉니다.

트럼보가 "읽는데 7시간은 걸리겠군" 이라며 질색하자,

커크 더글러스는 "재미와는 담 쌓은 대본이에요" 하며 동의하곤, 이어서 말합니다.

"하지만... 탁월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작품이죠."

그들이 미숙한 껍데기에 감춰진 이야기의 가능성을 알아본 덕에,

<스팔타커스>는 사장되지 않고 영화사의 걸작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줘야 할 때가 오면, 저는 다짐합니다.

나의 말이 이 타오르는 불에 끼얹어진 물이 아니라,

거기에 보태지는 새로운 장작이기를.

나의 눈과 귀가 나의 입보다 총명해서,

누군가의 위대한 가능성을 몰라보지 않기를.

나의 의견이 합리를 가장해 누군가의 세계를 망치지 않기를.

나아가 내가 이 사람과 이야기로 세상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를.


"그에게 있어 한 사람의 벗은 한 쌍의 귀를 뜻한다."

프랑수아 모리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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