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카와 치에의 호소
한 청년이 사냥총을 들고 요양원에 침입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노인들을 모조리 쏘아죽이곤
성명을 남긴 채 자살했다.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긍지로 여겨왔다.
나의 이 용기 있는 행동을 계기로 진솔하게 논의하여,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미치광이의 성명은 정부에게 확실한 핑계가 되어준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뒤 만성적인 세수부족과 연금고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75세 이상 고령자에게 안락사를 선택할 권한을 주는 제도,
'플랜 75'가 도입된다.
<플랜 75>는 홀로 꿋꿋하게 살아내려 애쓰는 78세 노인 미치,
삼촌의 플랜 75 신청서를 받게 된 공무원 히로무,
플랜 75의 전화상담을 맡고 있는 콜센터 직원 요코,
안락사한 노인들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의 이야기를
씨줄 날줄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아주 너그럽게 보아도, <플랜 75>는 시간을 잊을 만큼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80-90분 정도로도 충분했을 서사적 러닝타임을
2시간 직전까지 꾸역꾸역 밀고 나간다.
자극적인 이미지도, 장르적인 과장도 없다.
그저 이런 세상이 되어버린 일본을 길게, 무료하게, 담담하게 바라본다.
왜냐하면 이 영화 속의 '플랜 75'는 이미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노인들이 반발하긴 하지만 그들은 화면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다.
그들에겐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을 바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4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세상은 조용하고도 차갑게 그녀의 존재를 거부한다.
일자리는 어디에도 없고, 고독은 올가미처럼 죄어든다.
느리고 무료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의 시간은
그런 미치가 체험하는 세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영화를 꺼버리고 싶을만큼 고독하고 정체된 시간.
그래서 그녀가 플랜 75를 신청하는 순간은 정말 소름이 끼친다.
그건 우리도 언젠가 고독과 무력감에 지쳐
이 '자살 플랜'을 신청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이건 선택에 의한 안락사가 아니라 체제에 의한 살인이다.
젊은이들은 밥벌이를 위해 노인들을 안락사로 유도해야만 하고,
일자리를 찾아 온 이주노동자들은 죽은 이의 유품을 훔쳐 돈을 번다.
죽음으로써 순환되는 끔찍한 경제.
이 소름끼치는 제로썸 게임의 아이러니는 <플랜 75>를
가장 리얼리즘적인 <오징어 게임>처럼 보이게 만든다.
너의 죽음은 나의 생존.
상냥하게 죽음으로 인도하는 '얼굴없는 도우미'들은 그 냉혹한 경제체제 자체이며,
노인들이 질소 가스로 안락사당하고, 유품인 가방이 가득한 센터의 풍경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킨다.
하야카와 치에의 카메라는 수많은 노인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며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사람들이 정말 죽어 없어져야 할 존재들로 보이느냐고.
물질주의와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늙음에 대한 혐오와 거부는 점점 도를 넘어가고 있으며,
공동체와 공존의 가치는 제로썸 게임이라는 경제논리 앞에서 힘을 잃은지 오래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만 하루에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10명은 고독 속에서 홀로 죽는다.
나는 세상에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죽고 싶은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라 죽음으로 내몰렸을 뿐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외면한다면 그 다음은 필시 우리의 차례이다.
플랜 75는 결국 플랜 65, 플랜 55, 플랜 45가 될 것이며,
끝내는 숫자조차 사라진 합법적 홀로코스트가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 죽어주십시오.
어떤 이유로도 생명은 경제라는 천칭에 올려선 안되며,
죽음을 강요하는 문명은 더 이상 문명이 아니다.
문명의 간판을 건 지옥일 뿐.
그래서 <플랜 75>는 영화라기보단 호소문처럼 보인다.
세상 모든 공동체에 보내는 눈물 겨운 호소.
"이렇게 되는 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이 영화는 내내 그렇게 외치는 것만 같다.
물론 이미 늦었다. 너무나 늦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귀를 열고 이 호소를 들어야만 한다.
이 광기의 제로썸 게임을 멈춰야만 한다.
세대간의 혐오를 멈추고 단절을 재건해야만 한다.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고 친구와 이웃과 공동체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이 소름끼치는 플랜이 현실이 되기 전에.
우리가 사랑하는 법을 완전히 잊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