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상실을 어떻게 이겨내는가
나는 너무 큰 상실을 겪으면 내일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상실 이후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
결국 상실이 잔인한 것은 뭔가를 앗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상실을 당하고도 우리는 기어이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송의 프리렌>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겪은 상실의 슬픔을 토로하는 일이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이 작가는 대체 얼마나 큰 상실을 겪은걸까 싶어서 숙연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송의 프리렌>은 상상하기도 힘든 상실의 비극을 겪은 자만이 창조할 수 있는 이야기다.
용사 판타지물이자 고전적인 JRPG 판타지라고 해야 할 <장송의 프리렌>은
보통의 용사 판타지물이 엔딩으로 다루는 장면을 오프닝에서 펼쳐낸다.
용사 일행은 이미 마왕을 쓰러뜨렸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용사 힘멜과 성직자 하이터, 전사 아이젠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감회에 젖지만,
마법사인 엘프 프리렌은 그저 무덤덤해보인다.
수천년을 살아가는 장수종인 프리렌에게 이 10년의 모험이란 번갯불 같은 찰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프리렌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이번엔 혼자.
8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옛 동료들이 있던 왕도로 복귀하고,
얼마 안가서 용사 힘멜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를 보내는 순간에야 프리렌은 깨닫는다.
힘멜이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은 그 사랑을 외면해왔다는 것을.
눈물은 너무 늦었고, 후회는 돌이킬 수 없다.
강철같은 전사였던 드워프 아이젠은 이제 도끼를 휘두를 나이가 아니게 됐고,
술을 그리도 좋아했던 성직자 하이터도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를 노인이 됐다.
프리렌만을 놔두고 떠나가는 세상.
장수종의 삶이란 끝없는 상실의 고통임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프리렌이 왜 그리도 무심한 사람이 됐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무언가를 잃는 것에 지쳐버린 것이다.
얼마 안가서 하이터마저 세상을 뜨지만,
프리렌의 곁에는 하이터의 유지가 남아 있다.
바로 하이터가 구했던 전쟁고아 소녀 페른.
그리고 아이젠은 프리렌에게 죽은 자들의 혼이 존재한다는 도시, 오레올의 전설을 알려준다.
그곳에 이른다면 힘멜의 영혼과 만나고, 미처 못 다한 말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레올로 가려면 옛 마왕성이 있던 도시 엔데를 지나쳐야 하고,
따라서 프리렌의 새로운 여정은 동료들과 함께 했던 추억의 여정과 정확하게 포개진다.
이건 힘멜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자,
소중한 추억을 되새기는 애도의 여정인 것이다.
힘멜이 프리렌에게 잊을 수 없는 변화를 남겼다면,
하이터는 새로운 동료이자 제자를 남겨줬고,
아이젠은 후회를 바로잡을 기회이자 목표를 건네줬다.
떠나버린 옛 동료들이 남겨준 삶의 의미.
뒤이어 아이젠의 제자인 슈타르크가 프리렌과 합류하면,
<장송의 프리렌>은 상실의 비극에서 추억과 계승의 모험담으로 진화한다.
옛 동료들은 없을지언정, 현재의 동료들이 있고, 여정은 반복되며, 추억은 계승된다.
찰나와 같은 인연. 그러나 영원과 같은 추억.
저명한 스토리 연구자인 로버트 맥기는 그의 저서 <Story>에서
작가는 이야기에 아이디어를 담을 뿐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증명하는 방식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주제를 입으로 떠들지 말고 서사를 통해 체험시키라는 말이다.
그 말처럼 <장송의 프리렌>은 우리가 추억을 통해 상실을 이겨낸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계승되는 추억의 모험담을 통해 절절하게 증명해낸다.
옛 동료들은 이제 프리렌의 곁에 없을지언정, 그녀의 안에서 살아 있으니까.
프리렌 말고도, <장송의 프리렌>에 등장하는 인물 대다수는 감정이 건조하거나 그 표현이 서투르다.
그건 프리렌의 첫번째 동행자이자 제자인 페른도 마찬가지다.
프리렌보다 어른스런 그녀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고,
죽음을 결심한 순간에 하이터에게 구원받았다.
페른이 너무 많은 상실을 겪었음을 아는 하이터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서 프리렌에게 부탁한다.
페른을 데리고 떠나달라고.
"오늘밤에 이곳을 떠나도록 하십시오.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애에게 이 이상 누군가를 잃는 경험을 시키고 싶지 않아요.
...프리렌, 페른을 부탁합니다."
그러자 프리렌은 답한다.
"...아직도 폼을 잡고 있는 거야, 하이터?
페른은 이미 헤어질 준비가 돼 있어. 니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은,
그 애한테 제대로 이별을 고하고 되도록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는 거야."
<장송의 프리렌>은 하이터와 페른이 이별하는 순간을 그리지 않았다.
심지어 페른의 눈물마저 묘사되지 않는다.
그저 하이터의 묘를 두고 떠나는 프리렌과 페른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장송의 프리렌>이 보여주는 이런 생략과 건조한 감정묘사들이
누군가를 잃는 슬픔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이자 이해처럼 보인다.
진정한 슬픔이란 감히 그려질 수도 없는 것이기에.
여정 속에서 프리렌은 몰래 페른의 생일선물을 준비한다.
그러나 페른이 프리렌에 대해 잘 아는 것과 달리,
프리렌은 페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녀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힘멜은 프리렌을 잘 알았지만, 프리렌은 힘멜을 몰랐던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동료에게 무심하다는 것을 깨달은 프리렌은 페른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오랜 고심 끝에 고른 머리핀을 건넨다.
"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감사합니다. 무척이나 기뻐요."
"정말?"
"프리렌 님은 너무나도 둔감하시니 똑똑히 말씀드릴게요.
프리렌 님이 저에 대해 알려고 하셔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기쁘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이 기쁘다고 말하는 페른의 표정은 왠지 슬프게만 보였고,
그 얼굴이 나에겐 이상하리만치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 얼굴에 깃든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상실을 겪은 페른에게,
이런 기쁨과 감동이란 또 언제 잃어버릴지 모를 아픔이기도 했던 거니까.
내 추억 속엔 자꾸 페른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장송의 프리렌>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릴 것 같다.
그 사람으로 인해 나는 프리렌과 페른을, 그리고 이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사람이 가진 상실과 아픔을 전부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을 거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이니까.
다만 힘멜이 프리렌에게 그랬고, 이젠 프리렌이 힘멜에게 그랬듯이,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아직도 애쓰고 있다.
인연은 찰나일지언정, 추억은 영원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