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면허 작가의 운전면허 도전기
과거 내 스승께서 말하시길,
작가는 운전을 안 하는게 좋다고 하셨다.
작가가 운전을 해봐야 글은 안쓰고 여기저기 놀러다니기 바빠질 뿐더러,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책 한자라도 더 보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럴듯한 말씀이다 싶었던 나는 그 가르침을 충실히 받들었고,
여지껏 무면허의 삶을 영위해왔다...만,
물론 핑계다.
저 말을 들은게 서른살 무렵인데,
그 즈음이면 보통은 면허를 따고도 남았을 나이니까.
그냥 차를 몰 여건도 안됐던 데다가,
돌아다니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서 운전을 할 의지가 1도 안생겼을 뿐이다.
이십대 후반엔 늦게 면허에 도전하던 친구가 학원에 같이 등록해서 면허를 따자고 꼬드겼는데,
운전학원비를 다 내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에도 '귀찮다'며 거절했었다.
말하자면 그냥 면허를 안 따다보니 영영 안따게 된 것이다.
한국 드라마계 본좌 중 하나이신 박경수 작가님의 <돌풍>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이니까. 살아온 대로, 살아가겠지."
맞다.
사람은 살아온 관성을 쉽게 못 버린다.
뭐든 버릇이 되는 거다.
책을 안 보기 시작하면 계속 안보게 되고,
마감을 어기기 시작하면 계속 어기게 되며,
되는 대로 살다보면 영원히 그렇게 살게 된다.
다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변한다. 나쁜 쪽으로만 말이다.
아무튼 <돌풍>의 저 대사는 오랫동안 내 심장을 울려왔고,
나는 올해 1월에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하나의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제2탄생 선언을 하겠다. 너한테 처음 하는 말이야."
(엔프피 특 : 갑자기 자기 마음대로 뭔가를 선언함. 보통은 작심삼일)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부연했다.
"더 나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겠다 이거야. 몰랐던 것들은 배우고! 안 해왔던 것들은 도전하고!"
친구는 이거 또 무슨 바람이 들었나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이 말하는 대로, 이런 결심은 대개 작심삼일로 끝나기 마련이다.
'언제까지 대본을 쓰겠다' 같은 구체적 목표도 달성하기 쉽지 않은 판에,
막연하게 더 나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목표가 어디 쉬운가?
더 나아진 나를 위한 과업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물론 내 일에 더 매진하는 거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작가로써 그닥 열심히 산 축에 속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되보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치고, 어렸을 때부터 글 좀 쓴다는 칭송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되려면 그런 '글 좀 쓰는 사람'들한테마저 글 좀 쓴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게다가 그 재능만으로도 부족하고,
끊임없이 연마하고 쉼없이 작업하는 성실성도 필요하다.
그걸 위해서는 글쓰기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만큼 글쓰기를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나에게 글쓰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지만,
그 재능이 대단한 성취들로 이어질 만큼 노력해본 적은 없다.
물론 단기간의 간헐적 노력들이야 많지만, 그 정도의 노력은 누구나 한다.
중요한 건 혼신의 노력을 숨쉬듯이 계속하는 거다.
그러나 글작업이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이미 해왔던 일의 연장일 뿐,
더 나은 존재가 되겠다면 그동안 안 해왔던 일에도 도전할 필요가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운전이었다.
사실 연초에 도전하려다가 할일이 너무 많아서 미뤄놓고 있었는데,
최근에 운전을 배워두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 된 일이 있었던지라 면허부터 빨리 따기로 결심했다.
나는 친구들 단톡방에서 물었다.
"무면허의 삶을 끝내기로 했는데, 면허라는 걸 따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그랬더니 연수시켜주겠다는 놈은 하나도 없고 다들 학원에 가라고만 했다.
"음... 너희가 연수시켜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무면허의 삶이 끝나는게 아니라 그냥 삶이 끝날 수도 있어."
"..."
나를 못 믿는 눈치였는데, 이해한다.
나도 나를 못 믿으니까.
내 생각에도 자가 연수를 통한 취득은 어림도 없을거 같고,
학원에서 꼼꼼하게 배우는게 나을 것 같았다.
문제는 어느 학원에서 배우느냐였다.
일단 자체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즉, 시험장에서 연습을 할 수 있는) 경찰청 지정 학원들을 추렸고,
그 중에서도 가급적 외곽지역에 있는 학원들을 알아봤다.
서울은 차도 많은데다 운전자들의 인내심이 파탄나 있기에 도로주행 난이도가 헬 오브 헬이기 때문이다.
예전 보작 친구가 최근에 면허를 땄다고 한 게 생각나서 물어보니,
경기도 쪽의 한 운전학원에서 비교적 쉽고 빠르게 면허를 딸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갈 엄두가 안났다.
나는 고민했다.
멀지만 쉬운 곳이 나을까, 가깝고 어려운 곳이 나을까...
꽤나 오래 고민하던 나는 나는 최대한 가까운 운전학원을 택했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 학원은 집에서 도보로 갈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그 인근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교통지옥이었다.
물론 그걸 모르고서 결정한 건 아니다.
기껏 딴 면허가 장롱면허가 되지 않게 하려면,
가급적 실전적인(?) 도로주행을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는 그날로 학원을 찾아가 거액의 수강료를 긁고 스케줄을 짰다.
그런데 왠걸, 비수기임에도 이 동네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서인지 학원 스케줄이 빡빡했다.
듣자하니 스케줄만 잘 짜면 사나흘만에 따는 경우도 있다던데,
여긴 사나흘은 고사하고 3~4주는 걸릴 상태였다.
고민하던 나는 ‘오히려 좋아!’라고 결론내렸다.
나는 친구들조차 운전 연수를 거부할 만큼 인간흉기인데,
너무 속성으로 배웠다간 운전면허가 살인면허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충분히 몸에 익을 때까지 텀을 두고 차분하게 따보기로 결심했다.
수강 첫날엔 3시간의 이론수업을 들었는데,
식후의 저녁인데다 직전까지 작업을 하다가 와서 너무 피곤했다.
맨 앞자리에서 대놓고 졸고 있는데, 갑자기 와장창!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
하필 졸고 있는데 졸음운전 사고 영상이라니, 왠지 저격당한 기분이 들었다.
보여주는 영상들이 하나같이 참혹한 사고 영상이라
운전을 하면 안되는 이유만 늘어나는 것 같았지만,
학원비는 이미 결제됐다. 낙장불입.
다들 아시다시피 면허를 따려면
(1) 필기시험과 (2) 장내기능시험과 (3) 도로주행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중 필기시험은 학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알아서 기출문제를 풀며 공부해서 지역 시험장에 가서 응시하면 된다.
시험을 보기 전까지, 모의고사는 5회 정도, 기출문제는 300~400개 정도 푼 것 같다.
개중엔 이걸 어떻게 맞춰? 싶은 문제도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어서 이미 면허가 있는 친구들에게도 풀어보라고 했는데, 전부 틀렸다.
얘네는 대체 면허를 어떻게 딴걸까?
어쩐지 횡단보도 앞 일시정지를 지키는 놈을 본 적이 없더라니.
모의고사는 전부 커트라인 이내로 합격했었지만,
정작 시험을 보는 당일엔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예습을 못했다.
그래도 모의고사에서 불합격한 적이 없으니 설마 떨어지겠어? 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시작했는데...
처음 보는 문제가 너무 많이 나왔다.
다행히 난이도는 높지 않았지만, 잘못 읽으면 망하는 함정문제가 가득했다.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없어'라던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두뇌를 풀 가동한 결과, 80점으로 여유(?)롭게 합격했다.
며칠 후, 나는 개선장군 마냥 학원에 들어서서 합격 도장이 찍힌 원서를 내밀었고,
마침내 장내기능시험 연습이 시작됐다.
인생 최초로 운전대라는 걸 잡아보게 된 것이다.
운전학원은 강사 운이 중요하다고 들었기에, 부디 친절한 선생님이 걸리길 바랬다.
다행히 1회차 선생님은 아주 젠틀한, 배트맨의 집사 알프레드 같은 분이셨다.
너는 뭐하다가 이제야 면허를 따는거냐 같은 무례한(?) 질문도 안 하셨다.
혹시 면허 취소돼서 다시 따는 거냐고 물어보시긴 했는데, 아니라고 하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 분은 초보운전이 피해야 할 나쁜 운전습관이나 버릇 등을 짚어주셨고,
부처를 연상케 할 만큼 자애로운 태도로 차량 조작법과 주행법을 알려주셨다.
쌩초보다 보니 브레이크 압력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정차가 내내 거칠었는데,
조금도 짜증내지 않고 차분히 알려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표한다.
문제는 2회차 선생님이었다.
여전히 친절하시긴 했는데, 말씀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감기에 걸리셨는지 마스크까지 쓰고 계신 통에,
운전하면서 들을 때는 아무리 집중해도 옹뇽뇽뇽뇽으로만 들렸다.
차를 세우고 귀를 바짝 대야만 무슨 말씀인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전방주시하랴, 익숙치 않은 차량 조작하랴, 말씀 잘 들으랴... 진이 빠지는 교육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꽤나 터프하신 분이라 내가 알아서 운전하게 놔두셨다는 것.
첫번째 선생님은 내가 영 못미더웠는지 자꾸 운전대를 대신 꺾어주셔서
조향 감이 도통 잡히지를 않았었다.
장내기능시험 코스를 10번 정도 뱅뱅 돌자 조향감은 좀 잡혔는데, 문제는 액셀이었다.
장내기능시험 코스에선 액셀을 쓰지 않고 드라이브 상태에서의 기본 속도로만 주행하는데,
유이하게 액셀을 쓰는 구간이 경사로 진입과 가속구간이다.
경사로 진입이야 액셀을 살살 밟으면서 넘어가면 되지만,
가속구간에서는 일시적으로 최저속도 20을 넘겨야 한다.
베테랑 운전자들에게야 시속 20은 기어가는 속도겠지만,
나같은 쌩초보에게는 광란의 질주(?)인 것이다.
(자전거로는 시속 50도 밟는 인간이…)
게다가 운전학원 차가 낡아서 액셀을 조금만 밟아도 엔진이 포효하는 통에,
별로 빠르지도 않은데 엄청나게 빠르다는 착각이 일어났다.
처음 액셀을 밟았을 때 배기음이 너무 우렁차서 영화 F1 찍는 줄 알았다. ('뭐지?! 이런게 급발진인가?')
그래서 악명 높은 'T자 주차’도 실수없이 다 성공해놓고, 유독 가속구간에서만 계속 감점을 당했다.
최저속도 20에 이르기도 전에 자꾸 겁먹고 브레이크를 밟는 게 문제였다.
뭐가 그리 겁나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학원 부지가 너무 좁아서 가속구간이 끝나는 커브 지점이 절벽이었다.
너무 과감하게 밟았다가 델마와 루이스 엔딩컷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는 묘안(?)을 떠올렸다.
'아니 잠깐, 계기판은 폼으로 있는게 아니잖아?
계기판을 잘 보고 속도가 20을 넘길 때까지 꾸욱 밟으면 되겠군!'
그렇게 다시 가속구간에 진입하는 나는 계기판을 보며 액셀을 밟았는데... 선생님의 다급한 일갈.
“차가 어디로 가는거여 지금?!”
그제야 전방을 보니 차가 비스듬히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크, 하며 방향을 정렬하자 브레이크를 밟는 선생님.
그리고 나를 지긋이 보며 한마디.
"...지금 계기판 봤죠?”
"...네."
"아니 눈뜬 장님도 아니고 앞을 봐야지, 계기판을 보면 우째요?!"
너무 창피해서 할 말이 없었다.
나같은 놈이 도로에 나가면 사고를 내는 거구나... 하며.
아무튼, 연습 당시에 가속구간을 감점없이 통과한건 딱 1번이었다.
15번 정도의 연습 중에 딱 1번.
며칠 뒤, 대망의 장내기능시험일이 다가왔다.
다른 응시생들과 대기실에 모여 있다가 호명된 순서대로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호명할 때 출생년도를 같이 부르는데, 죄다 01 ~ 04년생...
나는 왜 이들 사이에 섞여 있는가...
현타를 느끼다가 겨우 정신을 다잡고 합격을 위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출발할 때 좌측 깜빡이, 경사로 진입 전에 깜빡이 끄고 경사로 정지선 넘어가면 정지,
주차 브레이크 걸고 삐 소리나면 해제...
T자 주차는 평행으로 진입, 차선을 어깨 라인에 맞추고 핸들 11시 방향으로 잡고 전진...
좌측 연석 모서리가 일직선을 이루면 핸들 왼쪽으로 끝까지 틀고 후진 기어...
살면서 내 캐릭터 시트도 이렇게 열심히 외워본 적이 없다.
약간 감점은 당하더라도 무리없이 합격할거 같긴 했지만,
이왕 하는거 만점으로 합격하고픈 생각으로 처절하게 복습했다.
아는 작가님이 내가 떨어지면 놀릴 작정으로 벼르고 있었기에 더더욱 독이 올랐다.
필기시험을 치르던 순간에 이은 제2차 두뇌 풀가동.
마침내 내 차례가 되고,
차량 조작, 출발, 경사로 진입, T자 주차, 교차로 진입, 신호대기, 돌발상황까지 무탈히 통과하고,
운전대를 한 손으로 다루는 노련함(?)까지 선보인 끝에...
마의 가속구간에 다다랐다.
가드레일 너머로 보이는 살벌한 절벽.
겁먹으면 안된다.
필사즉생 행생즉사라 하지 않았던가? (이럴 때 쓰는 말 아님)
나는 인생 최대이자 최후의 용기를 짜내서 액셀을 꾹 밟았는데...!
남들에겐 장내기능시험,
나에겐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데스레이스, 과연 그 결과는...?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