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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Dec 11. 2016

모호성과 붕괴의 미학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홍상수 영화의 매력은 그 특유의 지리멸렬함에서 찾을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사랑 앞에 한없이 찌질해지는 남자 앞에 여자는 남자와 술을 마신다. 그리고 둘은 사랑을 한다. 물론 그 사랑은 통속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사랑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누구 하나는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 구조인 셈이다.


<옥희의 영화> 속 젊은 남자는 옥희 앞에서 한없이 찌질하다. 플라스틱 소주와 새우깡을 앞에 두고 옥희에게 고백을 하고, 술에 쩔어있는 얼굴을 들이대며 다짜고짜 키스한다.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는 옥희의 집 앞에서 웅크린채 밤새 기다린다. 그렇다고 옥희가 무언가 크게 다른가라 묻는다면 그 것도 아니다. 옥희는 또 다른 찌질한 늙은 남자와 불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무언가 다른 것 같은 그 둘은, <옥희의 영화> 속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결국 큰 차이없는 찌질남 둘임을 극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이다. 안느는 '좀 유명한' 늙은 영화 감독인 문수와 불륜 관계 중이다. 안느는 문수를 사랑하지만, 문수는 안느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안느와 거리를 둔다. 몇 번의 거리둠이 지나고, 문수의 입으로 '본인의 유명세 때문에 조심' 운운하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 문수는 영화 감독이 아닌 한없이 찌질한 한 명의 남자로 관객에게 읽히게 된다. 지난 세월동안의 홍상수 영화는 늘 이런 식의 레파토리였다.


분명한 건 그 특유의 지리멸렬함이 어느 순간 스테레오 타입적인 부분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정확히 그 시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아마 전원사 창립 이후 나왔던 영화들로 기억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영화를 순차적으로 본다면 알 수 없었던 느낌이,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영화를 교차적으로 보며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난 몇 년 간 그가 만들어왔던 영화들은, 어떤 관객들로 하여금 지리멸렬함을 넘어선 환멸감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하는 얘기도, 이를 보여주는 툴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변함없는 내용과 스타일이 홍상수 영화의 매력이라지만, 해도해도 좀 너무했다. 적지 않은 홍상수의 팬들은 기어이 등을 돌렸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홍상수 감독의 18번째 영화인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그의 오랜 팬들에게도, 새로운 관객에게도 충분히 새로운 영화일 수 있다. 주연 배우에서부터 그렇다. 영화의 전면에 선 두 배우인 김주혁과 이유영은 기존 홍상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배우들이다. 사실 이유영이라는 배우는 크게 놀라운 선택이라 할 수 없다. 기존의 홍상수 감독 작품에서도 신인 여배우가 주연에 서는 경우는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의외였던건 김주혁의 발탁이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김주혁이란 배우는 조연이든 주연이든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는 배우다. 그동안 홍상수 영화에 등장했던 남자 주인공들이 모두 감독의 이전 영화에 얼굴이나마 비친 전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꽤나 주목할만한 변화이기도 하다.


내용 역시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 언뜻 보기엔 큰 틀에서의 차이는 없는 듯 하다. 여전히 상황은 반복된다. 인물만 다른 익숙한 상황들은 끊임없이 나열되며, 상상과 현실 인식이라는 의심과 부정의 싸이클 역시 끊임없이 반복된다. 기존의 홍상수 영화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명확하다. "나에 대해 뭘 아냐"고 외쳐대는 민정의 모습은, 이전의 영화들과 여전히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조금만 파보면 기존의 홍상수식 틀과는 꽤나 다른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민정이라는 캐릭터의 설정이다. 감독은 영화의 초반부가 지나자마자 민정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를 철저히 파괴시키기 시작한다. 그녀는 민정의 쌍둥이 동생이 되기도 했다가, 민정이 되기도 했다가, 민정이 아닌 그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한 명의 인물 위에 세 명의 캐릭터를 설정한 뒤, 그 캐릭터 자체를 완벽하게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모든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사실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홍상수 감독의 주된 특기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의 남녀 관계는 철저히 모호한 존재였다. 어떤 특정함을 능동적으로 거부하여, 관객에게 어떤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처럼 캐릭터 자체를 뒤흔들어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이러한 모호성은 홍상수 감독 특유의 연출 기법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관객들을 옭아매게 된다.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캐릭터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애써 사고의 끈을 놓지 않던 일부 관객들은, 상황의 반복과 영수의 상상을 보며 기어코 무너지고야 만다. 자신이 보고 믿던 모든 영화적 내러티브와 레파토리가 철저히 붕괴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온전히 영화에 집중한 관객일지라도 "마지막 장면이 꿈일까 현실일까"에 대해 명확히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이러한 작법의 가장 큰 효과는 바로 '주제 의식의 명확한 전달'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관객에게 끊임없이 묻는 것은 지식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 것이 총체적 사실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감독은 영화 자체에 대한 총체적 혼란과 캐릭터의 붕괴를 가져왔고, 관객으로 하여금 "What you see is What you believe"라는 가장 간명한 명제를 총체적으로 부정당하는 경험을 겪게 만든다. 물론 이전 작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제 의식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 극렬하게 주제 의식을 토해내는 영화는 없었다.


이 영화가 홍상수 영화의 변곡점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지난 몇 년간의 홍상수가 보여준 지난한 영화와는 확실히 다른 영화라는 것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그가 익숙한 이들에게도, 그가 낯선 이들에게도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영화다. 여전히, 홍상수는 홍상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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