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50만 원의 기적과 그녀의 호출기

by 홀로서기

"참가번호 27번, 연극영화과 김호준!"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무대 위로 핀 조명 하나가 뚝 떨어졌다. 객석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지만, 수백 명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떨지 마. 넌 돈 벌러 나온 거야. 이건 예술이 아니라 생계다.'


반주가 흘러나왔다. 토이(Toy)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전주가 흐르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서울에 있는 그녀를 떠올렸다. 빈 지갑을 채워주며 "기죽지 마"라고 말하던 그 표정.


"그때는 몰랐었어... 너무도 어렸었다는 걸..."


첫 소절을 뱉는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췄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못난 연하 남자친구가 보내는, 뒤늦은 사과이자 사랑 고백.

클라이맥스의 고음부.


"잠시나마... 내가 너의 곁에 살았다는 걸~"


목이 터져라 내지른 마지막 소절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1초 뒤. "와아아아아!!!" 강당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자, 대망의 대상 발표만 남았습니다! 상금 50만 원의 주인공은!"


두구두구두구... 드럼 롤 소리가 내 심장 박동과 겹쳤다. 제발, 제발. 2등 금상은 30만 원이다. 20만 원 차이면 기차표가 몇 장인가.


"참가번호 27번! 김호준! 축하합니다!!"


"으아아악!" 나는 체면도 잊고 무대 위에서 방방 뛰었다. 학과 동기들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와 나를 헹가래 쳤다. 시상식에서 받은 ‘일금 오십만 원 정’이라고 적힌 두툼한 봉투. 그것은 내게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땀범벅이 된 채로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삐삐 번호를 눌렀다. 음성 녹음.


"누나! 나야! 나... 1등 했어! 대상 탔다고! 50만 원 벌었어! 지금 바로 서울 갈게! 딱 기다려!"


전화를 끊고 터미널로 향하는 택시 안. 나는 상금 봉투에서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가 사준 가죽 지갑에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채워 넣었다. 홀쭉했던 지갑이 순식간에 빵빵해졌다.


에세이 삽화.jpeg


서울 강남 터미널.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야! 진짜 1등 한 거야? 대박이다 김호준!"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빵빵해진 지갑을 꺼내 보였다.


"봤지? 내가 채워온다고 했잖아. 가자! 오늘 야식은 내가 쏜다. 호텔 뷔페는 문 닫았으니까 소갈비 먹으러 가자!"


그날 밤, 우리는 터미널 근처 고깃집에서 소갈비를 배 터지게 구워 먹었다. 소주 한 잔에 상추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며 그녀가 웃었다.


"노래 불러서 번 돈이라 그런가, 고기가 아주 살살 녹네."

"앞으로 돈 떨어지면 말해. 행사 뛰어서 벌어올 테니까."


객기 어린 내 말에 그녀는 "그냥 알바를 해라, 이 화상아" 하며 핀잔을 줬지만, 그날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1997년의 봄밤. 내 지갑은 두둑했고, 옆에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행복은 없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는 것만 같았던, 폭풍 전야의 가장 화려했던 밤이었다.




작가후기 입니다.

어제도 말했지만 저는 노래를 못합니다.

극 I라 대회도 못나가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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