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 대학가의 꽃, 대동제(축제)가 열렸다. 캠퍼스는 낮부터 막걸리 냄새와 꽹과리 소리로 진동했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켜졌다. 지난가을 가요제 대상 수상 이후, 나는 교내에서 나름 '반짝 스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축제 당일 오후. 그녀가 휴가를 내고 학교에 떴다. 작년 3월 비 오는 날의 터미널, 4월의 연습실 방문, 그리고 6월의 첫 공연까지. 이미 내 동기들 사이에서 그녀는 '전설의 누님'이자 '물주'로 통하는 존재였다.
학과 주막(천막)에 그녀가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서자, 파전을 굽던 동기 놈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전체 차렷! 누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충성!! 오셨습니까 누님!!"
마치 사단장이 부대를 방문한 듯한 기세였다. 그녀는 익숙하게 선글라스를 벗으며 피식 웃었다.
"어구, 내 새끼들 고생하네. 호준이는? 노래 연습 갔어?"
"네! 누님 오신다고 목 푼다고 갔습니다! 여기 앉으십쇼! 제일 시원한 자리입니다!"
동기 놈들이 입고 있던 과 잠바를 벗어서 의자에 깔아주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자, 이거 받아. 너희 마시고 싶은 거 다 시켜."
그녀가 지갑을 열어 배춧잎(만 원권) 몇 장을 테이블에 쿨하게 던지자, 주막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 누님 만세! 김호준 만세!"
서울에선 내가 그녀의 귀여운 연하 남자친구였지만, 이곳 학교에서 그녀는 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주는 든든한 여왕님이자, 굶주린 내 친구들의 구세주였다.
드디어 밤이 되고, 대운동장 특설 무대. 사회자의 소개 멘트가 울려 퍼졌다.
"자, 우리 학교의 자랑! 가요제 대상 김호준 학우를 모십니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눈부신 핀 조명이 나를 감쌌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객석 앞줄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내 친구들이 '인간 바리게이트'를 치고 그녀를 상석에 모셔두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엔 캔맥주, 한 손엔 야광봉을 들고 나를 보며 엄지척을 날렸다.
"이 노래는... 오늘 서울에서 달려와 준, 제 1호 팬에게 바칩니다."
내 멘트에 친구들이 더 난리가 났다.
"우유빛깔 김정아! 사랑해요 누님!"
내 이름보다 누나 이름을 더 크게 외치는 놈들이었다.
내가 고음을 지를 때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고, 친구들은 그녀의 호위무사처럼 떼창을 하며 축제 분위기를 주도했다.
공연이 끝나고 내려온 무대 뒤편. 땀범벅이 된 내 등짝을 그녀가 시원하게 때렸다.
"잘하네 내 새끼! 오늘 좀 가수 같더라?"
"어때? 친구들이 호응해 주니까 더 잘 되지?"
"네 친구들 여전히 귀엽더라. 작년 연습실 때보다 더 넉살이 좋아졌어."
"그때 누나가 사준 핸드폰 덕분에 내가 기 좀 폈잖아. 다 누나 덕분이야."
우리는 잔디밭 구석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밤하늘의 폭죽을 바라보며 건배했다.
시원한 5월의 밤바람. 내 어깨에 기댄 그녀의 온기. 그리고 저 멀리서 "누님! 2차 가셔야죠!"라고 외치는 동기들의 주정 섞인 목소리.
1997년 5월. 나는 캠퍼스의 스타였고, 그녀는 내 친구들까지 충성하게 만든 진정한 나의 여왕이었다.
작가후기
네 그날 저는 영웅이였습니다.
물론 노래는 안불렀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