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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Jan 17. 2024

소모품으로서의 인간

<다음 소희>


보고 나면 온몸이 아프게 먹먹해지는 영화가 있다. 안타까움, 슬픔, 답답함 혹은 괴로움 등의 형용사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을 남기는, 그런 영화. 이미 알고 있는데 그래서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보고 나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영화. <다음 소희>가 그랬다.


소희(김시은)는 특성화고 학생이다.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된 소희. 대기업 하청의 하청임에도 대기업 산하라는 이유로 담임은 소희의 현장실습이 시작하기도 전에 성공적이라 자축한다. 담임은 소희에게 당부한다. 사고 치지 말 것. 여기서 말하는 사고란, 중간에 그만둬서 정해진 기간을 채우지 못한다던가, 상사에게 폭력을 행사해서 잘린다던가, 노동법과 관련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던가, 그래서 “학교 취업률 떨어뜨리는 병신”이 되는 뭐 이런 것일 테다. 이게 왜 사고일까. 그리고 이런 사고는 왜 발생하고 계속 반복되는가. 담임의 당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일말의 고민도 없다.


사고(事故)의 사건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 둘째 해를 입히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나쁜 짓. 셋째 어떤 일이 일어난 까닭. 이 정의에 따르면 사고를 친 것은 소희가 아니다. 자살을 포함한 여러 가지 뜻밖의 불행한 사건을 겪은 것도, 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해를 입은 것도 소희였다. 더구나 사고의 까닭은 소희에게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소희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친 것이 아니라.


마치 너를 위해서라는 듯한 ‘사고 치지 말라’는 담임의 말은 사실 이미 폭력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한 폭력들이 소희에게 쌓이고 쌓여 끝내 그 목숨을 잠식한다. 그러나 뻔하게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너무나 상투적이고 진부한 풍경. 서로 떠넘기며 누구보다 빨리 발 빼기. 그러니 상황은 당연히 진척 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일상은 다시 반복된다. 소희의 자리는 다음 소희가 어김없이 채운다.


그래서 형사 유진(배두나)의 존재는 어쩐지 비현실적이다. 죽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어쩐지 다 일찍 죽으니까. 미처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생을 마감하니까. 그런데 유진은 죽지 않고 목소리를 낸다. 묻고 화내고 찾아다니고 살피고 돌보고 운다. 살아 있기에 할 수 있는 책임의 모든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느껴져서 서글펐고 나의 현실이 이따위인가 싶어 울적해졌다.


유진은 소희의 시신과 함께 등장한다. 저수지에서 소희의 시신을 건져 올리는 장면에서 유진은 한 짝 밖에 없는 소희의 신발을, 그 추운 겨울 맨발인 발을 물끄러미 본다. 유진은 하나씩 하나씩 밟아간다. 두꺼운 군화를 신은 채 소희가 거쳐 갔을 길과 흔적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더듬는다. 모두가 외면하고 모른 척했던 것들을 직시하고 들추고, 당연히 물어야 했음에도 발화되지 않았던 질문들을 던진다. 한 삶에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기 위해 분노하고 따지고 울고 소리친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내는 소희의 친구였던 태준(강현오)에게 손을 내민다. 혼자 견디지 말고 전화하라는 유진의 말에 태준은 울음을 터트린다.


유진은 비참하고 참혹한 사건 앞에서 인간이라면 응당 기대하는 행동을 한다. 사고의 경위를 묻고 죽은 이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죽음이 왜 일어났는지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왜인지 뒤집어져서 이 당연해 보이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책임이란 회피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떠맡는 것”이라는데.* 세상이 뒤집힌 까닭은 모두가 회피할 수 있어서이기 때문일까.


기꺼이 책임지고자 했던 영화 속 인물들은 죽었다. 콜센터 전 팀장이었던 준호(심호섭)가 그랬고 소희도 마찬가지다. 책임지고 싶어도 질 수 없었던 이들, 준희(정회린), 동호(박우영), 태준은 자책하고 후회하고 괴롭게 슬퍼한다. ‘만약에’, ‘혹시나’를 곱씹으면서. 그러나 정작 책임져야 하는 이들, 학교 교사들, 교육청 공무원들, 장학사 등등은 당연하다는 듯이 회피한다. 늘 그렇듯 핑계는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 세상은 소희 없이도 돌아가야 하니까. 그러나 정말 그런가? 왜 다음 소희를 공급함으로써 세상은 돌아가야 하지? 영화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지점이 이것 아닐는지.


현실은 무수한 소희들로 돌아간다. 이 소희들은 그저 소비되고 소모될 뿐이다. 잔인하게도 지금 세상은 그럼으로써 돌아간다. 차갑게 식은 몸들을 연료로 굴러간다. 왜 그렇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영화는 말한다. 아무도 묻지 않아서 그렇다고. 소희에게 하고 싶은 게 뭔지 부모도, 학교도, 아무도 묻지 않은 것처럼, 그 몸들이 왜 차게 식었는지 묻지 않아서 세상은 계속 이렇게 돌아가는 거다. 영화의 서늘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물었다면 현장실습 나가는 학생에게 선생이 아무렇지 않게 습관적으로 사고 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 앞에서 나는 줄곧 지금도 당혹스럽고 부끄럽고 괴롭다. <다음 소희>는 다시 보기가 두려운 영화다.


상실은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은 그 부재한 자리를 상기시켜서 아직 살아남은 자들을 울게 한다. 유진이 마지막 장면에서 핸드폰 속 춤추는 소희를 보고 눈물을 떨어뜨리듯이. 다시 재현될 수 없는 장면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 봉합을 지연시킨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보이지 않는 제동을 건다. 아무리 기우고 채우고 지우려 해도 완벽한 봉합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세상은 소희 없이 돌아갈 수 없다. 상처 난 몸들이 계속해서 재생되는 한.


그러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숫자, 실적, 성과가 아니라 눈앞의 사람을 마주하는 것. 늘 문제는 그 얼굴을 외면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 테다. 우리는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하지 않지. 아마도 그래서 영화는 만들어져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당연하고 자명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 슬프게도.


* 지그문트 바우만 외(노명우 역, 2015), 『사회학의 쓸모』,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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