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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Aug 06. 2024

두 얼굴과 두 마음

『동조자』(The sympathizer)

비엣 타인 응우옌(김희용 역, 2023), 『동조자』(The sympathizer), 민음사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얼굴은 눈에 보이지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종종 표면의 얼굴만 보고서 판단 내리고 이면의 마음은 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 가령 『동조자』 주인공 '나'의 얼굴처럼 백인에게는 그저 노랄 뿐이고 황인에게는 너무 희어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얼굴은 차별과 배제 속에서 이용당하거나 소모될 뿐이다. 식별 불가능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의 얼굴은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하고 추방된다. 국가와 이념은 이방인을 물화(物化)함으로써 피상적 동일성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속한다.


이 폭력은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에게 진부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익숙하다. 트럼프가 다시금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받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일방적으로 가하는 공격이 정당화되듯이. 한국 사회가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재 진행형인 이 낯설지 않은 폭력의 시발점은 늘 얼굴이다. 트럼프를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배경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반대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근거도, 캄보디아 출신의 노동자가 얼어 죽었음에도 제도가 개선되지 않는 이유도, 시작은 다르게 생긴 얼굴이다. 인간은 자신과 닮지 않은 얼굴일수록 그 고통을 상대적으로 깎아내리며 감정을 덜 이입한다.


『동조자』는 이 얼굴을, 닮았으면서도 다른 얼굴, 그래서 상처 입고 고통받은 얼굴, 이방인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 얼굴로 하여금 직접 말하게 함으로써 표면 너머의 마음을 보게 한다. 침묵을 깨고 말하는 당사자의 얼굴이 드러내는 마음 앞에서 우리는 그 모양새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마음의 닮음을 자각하는 순간 관계는 흑백 논리 밖으로 새로이 확장된다. 사회, 문화, 역사, 환경, 인종 등 모든 조건이 달라도 '너'의 마음을 헤아려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경계가 흐려지며 견고한 듯 보이던 영역이 실상 환영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동조자』가 베트남 전쟁이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문제를 다시금 조명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여기에 있다.


남베트남 특수부 소속 육군 대위인 주인공 '나'는 베트콩 재교육 수용소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는다. 이유는 그가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CIA 소속 비밀 정보 요원인 동시에 실상 남베트남에 파견된 북베트남의 고정간첩이기 때문이다. 원래 북베트남 출신이었으나 어릴 적 남베트남으로 이주한 '나'는 프랑스 가톨릭 신부인 아버지와 그에게 고용된 소녀 가정부였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학창 시절 의형제를 맺은 만의 영향으로 일찍이 공산주의자, 베트콩이 된 '나'는 남베트남 장군의 오른팔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이 모든 정보를 베트콩에게 모조리 넘긴 "두더지"였다. 주인공은 스스로 이중간첩이었음을 시인하지만 변절하지 않고 베트콩 고정간첩으로서의 의무를 끝까지 수행한 자신의 진정성을 호소한다. 자신의 인생 거의 전부를 낱낱이 술회하며 '나'는 이편인지 저편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과거를 자백한다.


'나'의 태생적 이중성은 늘 문제적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요구하는 세계에서 '나'는 이것이면서 저것이고 이것도 아닌 동시에 저것도 아닌 탓이다. 그럼에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냈다. 이 생존의 원동력은 그가 대단히 위대하거나 저항적이거나 헌신적이어서가 아니다. 세상의 이것과 저것을 자기 안의 이것과 저것에 비추어 가늠하고 미루어 생각하는 마음이 그를 살아남게 하지 않았을까. 의형제이지만 각각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찢어진 만과 본 둘 다에게 '나'는 공감하고 연민을 느낀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그의 남베트남 상관이었던 장군과 미국 유학을 도운 CIA 요원 클로드 등 양극단에 서 있는 인물 모두를 '나'는 일정 부분 이해한다. 그가 "두 얼굴의 남자"이기 전에 "두 마음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마음은 이것이면서 저것이고 이것도 아니면서 저것도 아닌 '나'의 존재 자체에 기인한다. 애초에 "잡종"인 그에게 이중간첩은 선택이라기보다 어쩌면 필연이다.


이 필연을 놓고 '나'는 당위성이나 불가피함을 호소하거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혹은 이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마음들을 내놓는다. 살을 부대끼며 시간을 나눈 인물들에 대한 감정, 딱히 무엇이라고 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마음들을. 관계 속에서 생겨난 이 마음들이 그를 공산주의로, 남베트남 군인으로, 미국으로, 스파이로 이끌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나'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조국 베트남과 망명국 미국이라는 양단 모두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원제 The sympathizer의 동사형은 sympathize로 동정하거나 측은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동조하기 위해서는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셈이다. 이성적인 논리나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동조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형편을 헤아려 딱한 마음이 들 때 그와 뜻을 함께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듯 마음을 움직이는 얼굴은 단지 식별 가능한 기호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종이나 국가, 이데올로기와 같은 개념을 지시하는 납작한 지표를 넘어선다. 주인공 '나'에게 타자의 얼굴은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삶을 살아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실체다. 이로써 이분법은 해체되고 타자의 얼굴은 하나의 인격, 몸과 마음을 지닌 실재하는 인간이 된다. 이 자명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망각할 때 비극은 반복되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여전히 이 비극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다지 믿음직한 화자가 아니다. 패러독스와 아이러니, 부조리의 구현물이 곧 그인 탓이다. '나'를 가리키는 "잡종", "두더지", "이중간첩"은 이를 지시한다. 혐오와 비하를 내포한 명칭들로 호명되면서도 '나'는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생존했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무고한 인물을 스파이로 몰아 죽이고 이때 생겨난 죄의식이 그의 주위를 유령처럼 끈질기게 맴돌아도 '나'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살아있음이 도리어 그의 존재 자체를 의심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구심은 '나'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우리의 위치로 인해 강화된다. 우리는 그의 자술서를 읽는 심문자의 자리와 정확히 겹친다. 이 위치에서 우리는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수용할 수 없다. 의심하고 반문하며 그의 진정성이 진실한지 계속 저울질해야 한다. 매 순간 생존을 위해 이쪽과 저쪽을 부지런히 오간 '나'를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구금된 채 고문을 받으며 사상 검증을 받는, 죽음이 코앞에 닥친 극한의 상황에 놓인 '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동조자』는 곤란하고 곤혹스러운 소설이다. 제3세계에 대한 제1세계의 물리적 폭력과 양극단의 이념이 불러온 비인간적 참사부터 오리엔탈리즘적으로 대상화하고 타자화하여 재현하는 미디어의 차별적 시선까지, '나'가 발화하는 이야기 전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한편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무겁고 습하고 찐득찐득하다. 그러나 이 불쾌한 감정과 정돈되지 않는 께름칙한 마음이 아마도 '나'의 마음이지 않을까. 살고자 하는 절실함은 단정하지도 고상하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애정은 지저분하고 엉망진창인 채로 뒤섞여 한 존재를 뒤흔든다. 두 마음과 두 얼굴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나'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동조하는 수밖에 없다. 진실이나 정의 같은 거대한 개념과는 관계가 없다. 마음의 문제다. 이데올로기도 처음에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바라는 마음.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마음에서 시작하지 않았겠나. 이 마음들 앞에서 우리는 사실 모두의 얼굴이 될 수 있다. '나'의 얼굴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얼굴일 수 있다. 끝까지 '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그가 실은 우리를, 우리의 얼굴을 암시해서인 것은 아닐까. '나'는 '너'의 호명을 통해 존재한다. '나'의 발화는 우리를 향한 부름이니 이제 남은 몫은 응답뿐이다. 그가 꺼내놓은 마음에 이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응답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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