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자 AI는 나에게로 와서 마케터가 되었다

나도 모르는 역할을 AI에게 해내라고 하는 문제

by 꽃에서 꽃이 핀다

‘너는 10년 차 마케터야’라고 하면 AI는 정말 10년 차 마케터가 되어줄까?


AI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에서 자주 언급되는 테크닉 중 하나는, 바로 AI에게 역할(Role)을 부여하는 것이다.


"너는 10년 경력의 마케팅 전문가야."

"너는 숙련된 데이터 분석가야."


이렇게 역할을 지정하면 AI 답변의 정확도나 구체성이 올라간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전통적 의미의 ‘공학(engineering)’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년 경력의 마케팅 전문가'는 어떻게 일하나?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어떤 환경에서 의미 있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숙련된 데이터 전문가'의 경우는?


의외로 많은 직종에 객관화, 문서화된 '역량 기준'이 없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접근 방식이나 문제 해결 능력이 제각각이며, 연차가 길다고 무조건 일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퍼포먼스를 내야 하는지도 기준이 모호하다.


실제 직군 평가에서 직군별 역량 레벨을 정하는 일은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기업별로 공통된 기준 없이 HR과 현업 실무진의 협의를 통해 저마다 다른 기준을 정한다.


기업 안에서도 여러 직군에서 평가 기준을 만들기 어렵다. 일부 회사는 'S급=업계 글로벌 레벨', 'A급=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식으로 기준을 두는데, 국내 최고 수준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알기 어렵다. 결국 '감'이 개입되며, 같은 직종에서도 사람마다 세부 역량이 달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게다가 AI에게 역할을 부여할 때, 사용자는 그 역할에 대한 규정을 스스로도 모를 경우가 많다. 특히,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역할을 부여한다면 더 그렇다.


예를 들어, 어느 개발자가, 디자이너와의 협업 없이 나노바나나 같은 이미지 특화 AI를 사용해 혼자 일하기로 결심했다고 해보자. "너는 모바일 앱을 100개 이상 만들어 본 앱 전문 디자이너야."라고 AI에게 역할을 부여할 때, 이 개발자는 자신이 AI에게 어떤 역량을 부여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까?


물론 AI는 상당히 일을 잘한다. 아마도 그 정도 역할 규정을 해 주면 '알아서' 잘해줄 것이다. 사용자가 잘 모르고 있는 직군의 역량 기준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만들어가면서, AI에게 전문가의 역량 기준을 '알아서, 나름대로' 정하도록 하는 것이 소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일부다.


더 구체적으로 적으면 된다는 의견도 있다. 다음은 노트북 LM에서 제안하는 역할 규정 프롬프트의 예시다. 물론 이후 구체적인 업무 지시가 장문으로 이어지지만, 역할에 대한 설명만 보면 여전히 구체적이기 어렵다.


"1. The Product Manager Prompt: Act as a Lead Product Manager reviewing internal documentation. Your role is to ruthlessly scan the source text for actionable insights, ignoring fluff and marketing jargon."


'lead product manager', 'ruthlessly', 'fluff' 같은 표현은 여전히 모호한 기준을 담고 있어서, 사람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수준을 연상할 수 있다. 디자이너나 화가, 음악가 같은 창의적인 분야로 갈수록 역할 및 역량 프롬프트에도 'AI의 창의성'에 기대야 할 것이다.


노파심을 더하자면, AI가 나름 해석하여 내놓은 '역량 수준의 정의'가 사람들에게 강요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기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AI가 문제를 해결했을 때, 그 결과물의 퀄리티는 10년 차 광고 기획자가 해내야 하는 수준으로 이해되거나 역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고 사람들 간 논의를 통해 결정된 기준이 아니라, AI가 임의로 판단을 더한, 아직 인간에게는 합의되지도 준비되지도 않은 기준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추상적인 업무의 역량 기준을 객관화해 본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추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영역에서도 편협한 억지 잣대가 생길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AI가 제시한 기준을 인간이 따라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은, AI 시대에 새롭게 논의해 볼 만한 주제다.


(2025.12.18)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질병,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