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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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

예린은 바닥에 놓인 책을 다시 펼쳤다. 문장 하나하나가 전율처럼 피부를 스쳤다. 문체, 표현,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까지—이건 분명 자신이 쓴 글이었다. 아니, 적어도 한때 자신이 썼던 글이었다.

《달그림자》, 한예주 지음.

책날개의 작가 사진 속 예주는 평소보다 훨씬 진지한 얼굴이었다. 어떤 사적인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 냉정하고 단정한 이름, 그리고 오롯이 그녀의 이름 아래 완성된 책.

예린은 노트북을 켰다. 2016년 ‘moon_draft.final(3).docx’ 파일을 열자, 잊고 있던 문장들이 불쑥 깨어났다.

“달빛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말하지 못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바람에 실려 오래된 그리움을 흔든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예린의 호흡이 가빠졌다. 일부 문장은 완전히 같았고, 다른 부분은 살짝 방향을 틀어 더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그녀의 원고는 미완성이었고, 예주의 책은 완성된 이야기였다.

컴퓨터 앞에서 과제를 하던 예주에게 비밀폴더를 들켜버린 수년전 봄날이 생각났다.

“어머, 뭐야? 예린이 너 소설 써?”

“왜 남의 폴더를 허락도 없이 열어봐? 그만 봐! 닫으라고!”

잠금 설정을 해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예린이 소리쳤다. 예지가 웃으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모니터를 잡으려는 예린의 손을 막으며 예지가 소리 내어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쌍둥이 자매지만 둘의 성격은 판이했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문학소녀 예린과 달리, 예지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무명작가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예린에게, 출판된 책과 주목받는 작가가 된 예주의 모습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서점에 나가 책을 직접 사 오는 수고를 감수할 만큼 내용이 궁금했다. 책을 읽어가며, 예린은 기시감과 배신감이 뒤엉켜 책장을 넘기는 손이 떨렸다.


“봤어?”

예주에게 보낸 파일과 메시지는 하루가 지나도록 읽지 않음 상태로 남아 있었다.

결국 다음날, 예린은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편집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모든 원고는 예주 작가가 직접 제출한 것이며, 표절 시비는 이미 내부적으로 검토되었습니다.”

그날 밤, 예린은 오래된 일기장을 꺼냈다. 열여덟의 여름, 예주와 함께 글을 쓰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노트였다.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고, 옆에 나란히 앉아 한 줄 한 줄 이어가던 이야기들.

예주가 예린의 글을 바탕으로 완성한 걸까. 아니면 둘의 기억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저장된 걸까.

며칠 뒤, 예주가 예린의 집 앞에 나타났다. 말없이 앉아 있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 기억하지? 그 이야기. 우리 둘이 같이 썼잖아. 나는… 그냥, 그걸 끝내고 싶었어.”

예린은 눈을 감았다. 비난도, 이해도 아직 입 밖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분명 자신이었다. 하지만 완성은 예주였다. 우연히 발견한 원고에서 출발해, 과거의 공동 창작을 예주만의 방식으로 완성한 책.

전부 베낀 것도, 전혀 다른 것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선 창작물.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예주의 작품'이라 불렀다.

밤이 깊어지고,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예린은 노트북을 다시 켰다.

새 문서. 새 제목.

《그림자 너머》

그녀는 첫 문장을 썼다.

“진짜 이야기는, 잊힌 쪽에서 시작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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