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번째 이유, 죽음
< 초판에 포함되지 못했던 이야기, 넷 >
[퇴사하고 공방 합니다]를 브런치북으로 묶으며,
30편으로 맞추기 위해 빠진 내용들이 있어요.
아무도 읽어주지 않으면 서운 할 이야기들
어쩌면 당신에게 꼭 필요할지 모를 내용들
하나씩 풀어 내 볼게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막 입사 한 20대의 저는 죽음이 아주 먼 미래라고만 생각했어요. 죽음과 관련된 영화를 볼 때, 병원에 진료를 보러 갔다가 장기 입원 중인 사람들을 마주 할 때, 도로 위에 로드킬을 당한 작은 동물을 스쳐갈 때. 잠시잠깐 죽음에 대해 고민해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어요. 바쁜 일상 속에서 죽음이란, 그저 아주 먼 미래에 있는 미지의 순간이었을 뿐이니까요.
여러 번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도, 죽음이란 단어에는 현실감이 없었죠. 죽음은 누군가의 할아버지, 할머니, 때로는 누군가의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었어요. 저의 역할은 갑작스러운 슬프을 위로하러 가는 방문객. '국화는 어떻게 놓는 것이더라, 조의금 봉투에는 왼쪽에 쓰더라 오른쪽에 쓰더라, 어떤 말로 조의를 표해야 하나?' 그 정도가 갑작스러운 부고를 접한 저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어요.
아, 그 해는 참 이상했어요. 돌이켜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답니다. 일생에 한번 일어나기도 힘든 일들이 몇 개월에 걸쳐 세 번 연달아 일어났으니까요.
첫 번째.
그녀는 대학교 때 알던 한 살 위의 언니였어요. 대학교에 다닐 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같은 회사에 지원하고 같은 날 시험을 보면서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지요. 저는 지원했던 회사에 입사했고, 언니는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언니는 결혼 후 해외로 거처를 옮겼어요. 자연스럽게 일도 그만두게 되었고요. 직업도, 사는 곳도 달랐지만 아기를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우리에겐 새로운 공통점이 생겼어요. 페이스북을 통해 육아 고민을 나누며 개인적인 연락도 간간히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언니가 식당에서 아이와 남편과 함께 랍스터를 먹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을 올렸어요. ‘여전히 잘 지내고 있구나’ 살짝 미소 지으며 별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렸지요.
그런데 불과 3일이 지난 후, 믿지 못할 하나의 게시물이 올라왔습니다. 언니가 건강상의 이유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소식이었어요. 그 게시물이 올라오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언니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지요. 뇌출혈이었죠. 믿을 수 없었어요. 불과 며칠 전까지 생생하던 삶이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꺼질 수 있지?
두 번째.
황망한 소식으로 인한 눈물이 다 마르기도 전에 두 번째 장례식의 소식이 들려왔어요. 회사에서 알던 지인이 갑자기 원인불명의 이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죠.
그는 저와 불과 두어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사람이었어요. 가족이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았대요. 집에 가 보니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고 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미처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말이에요.
차마 무슨 위로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그와는 생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도 않았고, 친하던 사이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비슷한 연령대에서 오는 동질감 때문이었을까요? 눈물 밖에는 나오지 않았어요. 헛헛한 마음에 며칠 동안 일이 손이 잡히지 않았죠.
세 번째.
입사 3년 차에 신입사원들을 인솔하는 지도선배로 잠시 파견을 나갔었답니다. 막 입사 한 후배들과 한 달 동안 함께 먹고, 뛰고, 잠도 못 자며 다양한 미션을 수행했어요. 입사 동기만큼이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요.
연수가 끝난 후 저는 부서로 복귀했어요. 후배들도 각자의 부서에 배치되었죠. 처음에는 단체 채팅방의 알람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 세세한 근황이 공유되었어요. 하지만 어느덧 일주일에 한 번, 급기야는 한 달에 한 번, 겨우겨우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오곤 했죠.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1명의 읽음 표시가 줄어들지 않는 거예요. 채팅방에 있는 스물두 명의 프로필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중 한 명의 프로필이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진은 사라지고 ‘ㅇㅇ야 보고 싶다’는 소개 글이 전부였어요. ㅇㅇ는 후배의 이름이었고요.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부정하며 쿵, 내려앉는 마음을 붙잡았어요.
그 후배는 더 이상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았기에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요. 가까스로 후배를 아는 사람과 연락이 닿아서 뒤늦게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지요. 1년 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요.
1년이 지난 후에나 알아채다니. 한동안 후배를 보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후배에게 무심했던 과거가 떠올라 미안해져요.
백세시대라고 하지요. 어떤 이들은 이제 평균 120세 까지도 너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요. 하지만 세 번의 장례식은 저에게 평균 수명이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보장되어 있는 시간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Today is Present!”
‘선물 같은 하루’ 라던 식상한 문구가 어느 때보다 진실되게 마음에 콕 박혀 들어왔어요. 아무렇지 않게 웃고, 기뻐하고, 울고, 한숨 쉬고, 불평하며, 당연하게 살아왔던 오늘. 매일 아침 깨어나서 살아가는 24시간이 그 무엇보다 큰 선물이라는 것을요.
그 당시 저는 아침에 출근하고 별을 보며 퇴근하고 있었죠. 보고 싶은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고, 뒤통수만 봐도 화가 나는 사람들과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바빠서 미용실에도 못 가고, 염증이 생긴 귀의 고통을 버티며, 살아가기보다는 삶을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24시간을 선물이 아닌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언젠가’ 찾아 올 커다란 행복을 위해 ‘오늘의’ 작은 행복을 미루지 않기로 했습니다. 세 번의 죽음이 가르쳐 주었거든요. 그 언젠가의 순간이 언제 올지, 오기는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을요.
성경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한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 모으기에만 급급합니다. 모으고, 모으고, 착실하게 모으고… 급기야는 새로운 창고를 지어서 또 모으기를 반복하죠. 어느 날 그는 자신에게 마지막 날이 찾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언젠간 쓰리라 모아둔 것을 전혀 쓰지 못한 채로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누가복음 12:20)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사람은 모았던 것은 돈과 재물입니다. 그러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으고, 모으고, 모으기만 한다면 평생 써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요.
세 번의 장례식 후, 역설적으로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서시’를 통해 말했듯, 죽어가는 모든 것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 없었어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모든 죽어가는 것.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언젠가 끝이 있기에 매일의 시간은 더욱 빛나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영원토록 지속되는 삶이라면 하루하루는 무료함으로 채워질 거예요. 유한하기에 소중하고, 의미가 생기는 것이죠.
시인의 읊조림처럼,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다고 다짐해 보았더랍니다. 쉽지 않겠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 보면서요.
“이생망”이라는 말 들어보셨을까요? '이'번 '생'은 '망'했다는 문장의 줄임말이지요. 미안하지만 두 번은 없습니다. 이번 생이 망했다면 그걸로 끝이랍니다. 인생에는 게임처럼 ‘다시 하기’ 버튼이 없거든요. 그러니 오늘, 지금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요. 지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맹렬히 찾아보자고요. 그 길이 퇴사이든, 아니든.
안녕하세요! 블루밍봉봉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퇴사하고 공방합니다] 초판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작가로서 한 발을 내디뎌 보았습니다. 응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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