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생리통과의 여정

5년 내 재발률 40%, 자궁내막증 환자로서 살아가기 (1)

by 일랑



생리통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기억하는 순간부터는 생리통을 앓고 있었다. 대학생 때 한 번은 홀로 집에 있다가 쓰러져서 버스로 두 정거장인 대학병원을 가지 못해 구급차를 부른 적이 있다. 전화를 어떻게 했고 어떻게 문까지 기어 나갔는지 흐릿한 기억 속 파편만 남았다.

그때만 해도 결혼도 안 한 학생이 산부인과에 가는 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는 때였다. 그냥 생리통이 심할 뿐이지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좀 더 커서 직장인이 되어 받은 검진에서 의사 선생님은 큰 혹이 있기는 한데 별 건 아니니 임신을 준비할 때 제거를 하면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내 배 속에 있는 혹의 심각성을 진짜로 알아챈 것은 생리양도 너무 심해져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즈음이었다. 집에서 새로운 생리대를 (그것도 대형을) 찬 후, 10분 후 버스에서 내려 발을 디딛는 순간 느낌이 왔다. '이대로는 한 발자국도 더 걸어갈 수 없다.' 바로 택시를 잡아 집에 돌아가며 깨달았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남의 생리양이나 생리통을 내가 가늠할 순 없지만 일단 이건 정상이 아니야.

공강시간을 이용해 잠시 들렀을 뿐인데 의사 선생님은 가능한 한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자궁내막종이 6-7센티 정도인데, 이건 커다란 감자 하나를 배 속에 넣고 다니는 거라고. 당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라 그때만 해도 내게 더 중요한 건 시험이었다. 몇 달 남지 않았으니 그 때나 하겠다고. 의사 선생님은 여름방학을 사용해서라도 빠르게 수술하는 걸 권하셨지만.


신랑은 해외 취직을 해서 먼저 가게 되었다. 나는 홀로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고, 마쳤으며, 수술대에 올랐다. 인생의 첫 수술. “별거 아니야”라고 스스로 다독여도, 눈앞에 펼쳐진 하얀 병원 천장은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눈 앞 풍경은 수술실의 하늘 모양 천장으로 바뀌고 기계적으로 기도문을 읊어 주던 선생님의 목소리도 멀어졌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기운이 남아서인지 깜박깜박 거리며 자고 있던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만, 양쪽 난관이 막혀서 자연 임신은 어려우니 시험관 수술을 준비하세요." 만 스물여섯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내 난관은 막혔다. 친하던 친구들도 친정 가족도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얀 벽만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 보냈다. 복강경 가스로 인한 쇄골 통증이 한번씩 날 일으켜세워 산책을 시켰다.


자궁내막증은 재발이 잦은 질병이고 임신을 빨리 해야 자궁내막증을 예방할 수 있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다 추스러지기도 못한 채 빠르게 준비했다. 그 이후는 비슷하다. 난임부부들이 다들 겪는, 흔한 어려움들을 겪었다. 해외에 살아서 시도 기회가 제한적이었지만, 설렁 한국에 있어도 쉽진 않았으리라 스스로를 위안했다. 시간 낭비없이 바로 시험관 시술에 돌입할 수 있는 점도 그나마 감사할 일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홀로 입국해 과배란 주사와 난자 채취, 이식의 과정을 반복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힘들어한 신랑을 보며, 미안하기만 했다.


날씨가 좋은 가을, 신랑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난자 채취를 하고 집에 돌아와 나란히 누워 쉬는데, 갑자기 "여보, 이상해. 응급실 가야 할 거 같아."라고 말했다. 당황한 "갑자기 무슨 응급실이야, 별일 없을 거야. 병원에 한번 전화로 물어봐보자."며 만류했지만 "아냐, 지금 가야 해. 가야만 할 것 같아." 단호하게 택시를 불렀다.

난자 채취가 잘못되어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 나는 어떻게 알았던걸까. 어지러움에 비틀거리며 CT를 찍고 보니 복강에 피로 가득했다. 그대로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네 팩이나 수혈받고 자궁내막증 수술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견뎠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엄마가 울며 불며 기도하는데, 수혈팩을 붙이고도 피가 모자라 눈이 안 떠졌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나 괜찮아'라는 말을 속삭였던가, 속으로만 했던가.

지혈이 늦어지며 퇴원이 계속 미뤄졌고, 열흘 가까이 병원에 갇혔다. 한국에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병원에서만 보내다 출국이 며칠 남지 않게 되자 신랑이 이게 뭐냐며 불평을 토로했는데, 그때의 서운함도 아직 기억이 난다. 그런 조금 흔하지 않은 어려움도 겪었다.


난자 채취 후 멈추지 않는 과다 출혈은 흔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우리의 배아가 볼모로 잡혀 있었다. 사과도 한마디 없는 병원에서 남아 있는 냉동 배아만을 사용하고 병원을 옮기자고 다짐했다. 뜻밖에도 다음 냉동이식 때 임신이 되었다. 어쩌면 혈복강 수술이 전화위복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전 한 차례 겪은 초기 유산(놀랍게도 그건 내 처음이자 마지막 자연임신이었다) 덕분에, 면역 검사를 미리 해 두었고 매일 같은 시간 직접 배에 놓는 주사를 몇 달간 맞아 아이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는 차분히, 무럭무럭 자라 주었고 마침내 출산의 순간을 맞았다—라고 쓰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모든 과정이 거쳐야만 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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