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의자

-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준비하고픈 것.

by 해야블라썸

운전하면서 듣는 라디오 속에서 단아한 어투를 가진 진행자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는 걷다가 지치면 의자에 잠시 앉아 쉬어갑니다. 그러면, 마음이 힘들 땐 어떻게 쉬어가시나요? 마음의 의자는 있으신가요?"


마음의 의자.


그렇네요. 연말에 찾아온 내 우울감은 여러 상황이 겹치기도 했지만, 내 마음 쉬어갈 의자를 잃어버린 게 가장 큰 이유처럼 느껴졌어요. 라디오 진행자가 추천한 마음의 의자는 좋은 글귀였습니다. 내 눈이 닿는 곳 어디든 좋은 글귀를 써두고 본다면, 그때마다 마음이 잠시 쉬어갈 수 있지 않겠냐며 애청자들에게 추천 글귀를 지금 이 시간 함께 나눠보자고 제안했어요. 이 제안에 진심인 여러 애청자들은 함께 나눌 좋은 글귀들을 스스럼없이 공유하기 시작했지만, 볼 일을 보러 가던 중이었던 나는 딱 거기까지만 들었네요. 목적지에 도착했기에 아쉽게도 좋은 글귀를 수혈받을 수가 없었어요.


한동안 아픈 허리 때문에 하던 운동을 멈추고서 조금은 우울했었습니다. 학기 중 바쁜 가운데서도 짬을 내어 동료들과 함께 친목도 다지고, 건강도 챙길 겸 배드민턴을 쳤었거든요. 같은 학년, 같은 실, 같은 업무, 같은 교과 등으로 편을 만들어서, 경기가 마음처럼 안 풀릴 땐 서로 격려도 하고, 이기면 기분이 좋아서 서로의 손바닥을 맞추며 하이파이브를 하곤 했었죠.


수업과 업무의 틈새에서 지치기도 했지만, 그 바쁜 틈에서도 먼저 운동할 시간을 찾아서 하고 나면,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아 있어도 행복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일은 언제 하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답은 당신이 퇴근 한 사이에...였죠. 혼자서 하는 일은 퇴근 시간을 넘겨서라도 남아서 하면 되니까요. 일보다도 일단 내 마음이 우선이니까 더 늦게 퇴근하는 게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방학이 되는 게 걱정이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운동이 배드민턴인데, 한동안 탄력 받은 배드민턴을 칠 수 없게 되니까요. 그래서, 방학 중에도 함께 모여 배드민턴을 치기로 약속하고 모임을 유지했었습니다. 더운 여름이었기에, 아이스커피 내기로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어쩌다 교장 선생님과 마주쳤을 때는 체육과이신 교장선생님께 레슨 해달라며 코트로 이끌기도 했었죠.


대학을 갓 졸업한 막내 선생님이 어쩌다 패션후르츠 열매가 많이 생겨 청을 만들었다고 들고 온 패션푸르츠 청으로는 탄산수로 에이드를 만들어 먹기도 했죠. 방학 중이라 근무하실 선생님이 별로 없을 듯한 교무실에는 에이드 하나 때문에 열댓 명은 족히 수용할 커다란 테이블에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모여서, 결국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출근한 모든 선생님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게 만들었죠. 친한 사이의 선생님뿐만 아니라, 별실에 있어서 이 날 처음으로 대화해 보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더운 공기 속에서도 하하 호호 웃음꽃을 피웠더랍니다. 이것이 불과 6개월 전의 일이었네요.


그렇게 2학기를 맞이했고, 학기가 시작되어 포스트코로나를 맞이한 우리들은 더 바빠지기도 하였지만, 모임을 주관하던 내가 코로나까지 걸려서 모임을 알리지 않으니, 배드민턴을 치자는 말이 쏙 들어가 버렸어요. 설상가상으로 내 허리까지 삐끗했고, 2학기가 되면서 새로운 인사로 이전 멤버들이 달라진 탓도 있었죠. 그렇게, 2학기에는 배드민턴 모임이 자취를 감춰버렸어요. 어쩌다, 남아있던 멤버들과 마주치면, 배드민턴을 한번 쳐야 하는 데 하면서 아쉬워하기도 했구요.


배드민턴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업무적으로 쌓였던 불평과 관계의 껄끄러움, 스트레스는 셔틀 콕 스매싱 한 번으로 날려버렸었는 데 그럴 기회가 없어진 게 많이 아쉬웠답니다. 코트에서 나를 향해 매섭게 날아오는 셔틀 콕을 맞받아 다시 반대편으로 내리꽂으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는 데... 때로는 미처 내가 자리 잡지 못한 공간 속으로 날아온 공을 놓칠 때면, 그 끝을 애써 따라가며 받아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 순간이 그렇게 비통할 수가 없었는 데... 내 역할을 다 못하여 우리 팀이 질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같은 편 실력자의 응원도 받고, 때론, 내가 팀의 실력자가 되어 같은 팀원을 격려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기쁨과 절망도 함께 나누었는 데...


작년 1학기는 이렇게 배드민턴 모임이 내 마음의 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이유로 이 의자가 사라지니, 나는 우울해질 수밖에요. 그래서, 새 학년과 새 업무를 준비하려는 이 즈음, 새로 맡게 될 학년의 교재연구도 새로운 업무를 위한 공부도 필요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는 먼저 마음의 의자를 준비하려 합니다.


라디오에서 추천해 준 좋은 글귀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고, 브런치에서 만나게 될 화수분 같은 작가님들의 여러 글도 될 수 있을 것이며, 친한 지인들과의 수다스러운 커피 타임도 내게는 마음의 의자가 될 것입니다. 허리가 조금만 괜찮아진다면, 배드민턴 모임 재개도 마음의 의자가 되지 않을까 싶구요.


무엇보다도, 얼마 전, 배드민턴 대신에 시작한 걷기도 내 마음의 의자가 될 것 같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단순한 걷기가 아니라, 30년지기인 친구와의 수다입니다. 최소 일주일에 두 번은 저녁시간 한 시간 정도 같이 걷기로 했거든요. 어제는 저녁 8시에 만나서 걷기 시작한 일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 10시가 다 될 때까지 걸었네요. 딸에게서 왜 아직 안 들어오냐는 걱정스런 전화에 정신 차려 시간을 확인한 거죠.


내 30년 지기는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대학교 같은 과 동기이고, 결혼 후 같은 동네에 살게 되었습니다. 허물없는 사이여서, 속 시원한 대숲 역할을 톡톡히 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같은 직종이면서도 학교가 다르다 보니 방학 외에는 커피 한잔의 여유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함께 걷기로 하였습니다. 어쩌면, 함께 수다떨기로 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일정한 약속이 있으면, 그 핑계로 밤늦게까지 학교 남아서 하던 일도 잠시 손에서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친구가 좋아라 하네요. 물론, 저도 더할 나위 없이 좋구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대화하지 않아도 되니까. 작은 실수 하나로 오해가 생기는 사이는 아니니까. 나에게 베푼 친절 속에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불편함을 느낄 사이도 아니니까. 언제나 서로의 편이 되어서 응원해 주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며 서로의 판단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는 편하게 조언해 주고 격려해 줄 사이니까. 그냥 서로 편하게 가감 없이 현실을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느낌을 공유하면서, 현실 속에 찌들린 마음도 함께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마음이 쉬어가는 의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나에게 겁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에서든 현실에 부딪히는 문제 앞에서는 용기 있게 잘 대처할 단단한 마음 근력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 말에도 물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런 마음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마음이 쉴 의자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홈트를 하든, PT를 받든 간에 이러한 육체의 단련에도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긴 호흡과 몇 초간의 쉼이 필요하듯, 마음이라고 다를까 싶어서요.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마음의 의자를 단단히 준비해 놓으려 합니다. 언제든, 지친 마음이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그 쉬는 순간이 잠깐이어도 이내 곧장 자세를 바꾸고 다시 일어날 힘을 줄 수 있도록...


날이 부쩍 따뜻해졌습니다. 겨울의 끝이 보이고, 봄이 오려하네요.

새롭게 시작될 봄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의 의자를 준비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