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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Sep 04. 2022

그럼, 밥은?

- 엄마가 이제는 좀 아파도 될까?

아침부터 목이 따끔따끔하더니, 뭔가 나무껍질 같은 거끌거끌 한 것이 목 안에 자라는 중인 거 같다. 무더위가 언제 있었냐는 듯 아침저녁의 서늘한 바람으로 일교차를 느끼게 되는 계절이니, 으레 있는 직업병인 줄 알았다. 몸 져 누울 지경만 아니면 조퇴를 하는 일도, 병원 가는 일도 잘 없는 나지만, 요즘처럼 코로나 환자가 많은 시기엔 조심스럽기는 하다.


올봄에도 같은 증세가 있어서 조심스러움에 매일 자가진단키트를 했더니, 키트 상으로는 별다른 변화도 없었고, 검사해도 음성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일단, 증상이 나타난 지 몇 시간 안 되었으니, 임시방편적으로 따뜻한 커피며, 따뜻한 차로 틈날 때마다 목을 축였지만, 퇴근할 때까지 목의 칼칼한 정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은 심상치 않다. 병원은 이미 문 닫을 시간이라, 얼른,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상을 차렸다. 혹여나 몰라서 집에서조차 마스크를 하고, 가족들만 따로 밥을 차려줬다.


아이들도 신랑도 이런 내가 수상한 지 내게 물었다.


"왜 그래?"


"어? 목이 아픈데, 요즘 환자들도 많고 하니까 혹여나 몰라 조심하는 중이야."


내 옆자리의 선생님이 격리돼서 돌아온 지 이틀 째 되는 날이었다. 옆자리라고는 하지만, 가운데 통로가 있어서 2미터 정도는 충분히 떨어져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딱히 돌아다니지도 않고 지난 주말에도 집에만 있었다. 개학한 지 며칠 안 된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학생들만큼 나도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도 아직은 3월만큼 확진자가 많지는 않은 상황이기에, 딱히 감염될 만한 어떤 환경에 노출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늘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서랍장 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키트를 하나 꺼냈다. 학교에서 받은 것도 있지만, 봄에 한창 유행할 때 사비로 사두었던 것도 있기에 그걸 먼저 소진할 요량으로 조금은 낯선 진단 키트로 혼자 조용히 컴퓨터 있는 방에 들어가서 검사를 했다. 혹여나, 확진이면, 이 방에서 고립되리라 마음먹고서...


언제나, 봉으로 콧속을 후비는 기분이 싫어서 꺼려지는 검사이지만, 정확도를 위해서 열심히 후비고 또 후벼서 지시사항의 모범답안처럼 열심히 따라 했다. 그 결과, 두 줄이 나타났다.



  평소, 내가 알던 진단 키트는 빨간색 두 줄이 나오는 데, 이 키트는 회색 한 줄, 빨간색 한 줄이라 처음엔 헷갈렸다. 이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이 진단키트는 T선이 회색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확진이었다. 고립될 방에서 테스트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서 밤새 혼자 몸살로 끙끙 앓았다. 잔 듯, 안 잔 듯, 잔 거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음 날 아침 방문 뒤에 숨어서 출근하는 신랑과 등교하는 아이들을 배웅하며 말했다.


"엄마는 오늘 학교(내 직장)를 못 갈 것 같아. 병원부터 가봐야 해서... 혹시, 너희들이 집에 왔는데, 엄마가 아직도 집에 있다는 건, 확진이라는 말이니까 굳이 엄마한테 방문 열어 인사 안 해도 돼. 알겠지?"


"응. 알겠어."

 

목이 쉰 듯 당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회사에도 상황을 알리고, 병원을 다녀오며, 확진되었다는 소식을 회사에 또 알려주었다. 8월 마지막 날이고, 9월이 새롭게 시작되는 무렵이라 직장에도 변화가 좀 있을 터인데, 이 모양 이 꼴이 돼서 해야 될 일을 못하게 돼서 참으로 미안함만 가득이었다. 미안한 만큼 정신을 차리려고, 밥도 챙겨 먹고 약도 챙겨 먹었지만, 약기운 때문인지 몸살 기운 때문인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침대에 널브러져 있자니, 아들이 하교했다. 내가 없어야 될 시간인데, 있는 걸로 봐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방문 밖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검사받아봤어?"


"어... 확진이래."


"그럼, 밥은?"


사실, 걱정하고 위로부터 해줄 줄 알았는 데, 아들의 뜻밖의 질문에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원시적인 솔직한 발언을 들으니, 뭔가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른 그 어떤 존재이기 이전에 엄마였다. 아들의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교사로서 강사는 구했을지, 울반 학생들은 모두 출석을 잘하고 있는지, 수업 진도는 제대로 나가고 있는지, 내일 동아리 수업은 어찌 되는 것인 지 등 온통 학교 걱정뿐이었다. 엄마로서의 자각을 안 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절대 아프면 안 되는 사시사철 무쇠팔 무쇠다리를 가진 엄마여야 함을 잊고 있었다.


모든 엄마가 그러하듯이, 둘째가 코로나 걸렸을 때도, 다른 가족은 누구든지 둘째에게 접근해서는 안 되었지만, 나만은 가까이서 끼니때마다 밥을 챙겨주고, 가까이서 증상을 살피며 순간순간 열을 체크하고, 열이 날 때마다 해열제를 먹이고, 시간 맞춰 해열시트를 갈아주며, 아이에게 필요한 부분을 가까이서 살뜰히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아들이 입맛이 없어, 입에 머금었던 밥을 다 뿜어냈던 그 순간에도 바닥과 몸에 쏟아낸 토사물들을 닦아내며, 마치, 나는 코로나가 절대 걸리지 않는 사람처럼 확진자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용감한 그런 누군가였다. 그럼에도 다행히 코로나에 전염되지도 않았었다.


첫 애를 낳고서 아이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출산휴가가 끝나고 복직이 다가왔을 때도, 친정 엄마가 어쩔 수 없이 첫 애를 봐주시기로 하셨지만, 건강하지 않은 엄마 찬스를 쓰는 게 맘 편치 않고 힘들었던 나는 친정 엄마가 젊고 건강했으면 싶었다. 우리 엄마는 그렇지 못했지만, 나만은 우리 아이들에게 젊지는 않아도 건강한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정말, 처녀 적과는 달리 내 몸을 혹사시켜 육아와 가사, 직장을 병행할 때도 별로 아픈 적이 없었다. 아니, 아플 틈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둘째인 아들 어릴 적에도, 아들은 몸이 허약하여 병원에 종종 입원할 때마다 느낀 것도 엄마인 나는 절대 아프지 말자였다. 내가 건강해야 이 아이도 이렇게 간호하고 보살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라 또래 아이들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은 나는 건강한 것만이 나중에라도 아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강하게 함께 오래오래 아들과 딸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존재. 그런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런 내가 가장 최근에 아팠던 기억은,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운(?) 육아 9년 차, 5년 전 휴직 첫 해였다. 출산 휴가 외에는 거의 쉼 없이 직장 생활을 해오던 내가 쉬기 시작한 건, 딸이 초1 때도 아닌 초2 때였다. 딸의 마지막 육휴를 쓸 수 있는 기간. 그리고 연달아 아들의 육휴를 2년 더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휴직을 처음 했던 그 해에는 이제 쉴 수 있다는 맘이 커져서였는 지 그동안 참아왔던 아픔이 다 몰려오는 듯 몸이 꾸준히 아팠다. 물론, 몸 져 누울 정도는 아니어서 아파도 계속 가사는 했지만 말이다. 아이들을 학교나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몸이 그렇게도 피곤하고 노곤했었다. 매달 감기를 달고 살았고, 매일 곰 한 마리를 등에 업고 살았다. 날마다 낮잠까지 자는 데도, 피곤이 나에게서 물러가지 않았다. 결린 어깨, 알레르기 비염, 각막염이 날마다 나를 괴롭혔고, 생리주기마저 불규칙해졌다. 그래서, 갱년기가 일찍 오는 것인가? 오십견이 일찍 찾아오는 것인가? 했더랬다. 휴직 1년을 이유도 모른 채 비실거리며 보내는 데 다 써버린 듯했다. 그래도, 아프고 싶은 만큼 실컷 아프고 나니 1년간 만성질병으로 날 괴롭히던 알레르기 비염과 각막염이 2년 차에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었고, 3년 차에는 언제 그런 병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게 완치되어 있었다. 그 후로 아직은, 알레르기 비염이나 각막염으로 고생하지는 않는다. 설마, 다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서 아플 틈이 없기 때문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아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내 몸을 지배하여 맘대로 아프지 못했던 느낌이랄까?(의사 선생님 그럴 수도 있는 거 맞나요?) 그런, 정신적 강인함이 무장해제되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기니 그동안 밀린 아픔이 휴직 1년 동안 모두 밀려온 게 아닐까 하는 게 나의 말도 안 되는 지론이다. 그래서, 가끔은 직장 후배들에게 그동안 한 번도 쉰 적이 없다가 6개월이나 1년 육휴를 갖는 것은 더 피곤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능하면, 회복의 시간도 필요하니 더 긴 시간의 휴직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최선은 출산하고 1년은 쉬어 주는 게 아기를 위해서도, 산모를 위해서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꼼짝할 수도 없이 아프면, 우리 아들의 현실적인 질문처럼 당장 아이들 밥부터 시작해서, 손 놓아야 할 집안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신랑이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하던 사람이 챙기는 만큼, 가끔 하게 되는 사람은 놓치는 부분이 종종 있기 마련이다. 가령, 설거지는 해도, 싱크대 청소까지는 크게 생각지 못한다. 세탁기와 건조기는 돌려도, 옷을 개키고, 그다음 정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한다. 청소기는 돌리지만, 청소기 필터 청소까지는 잘 생각지 못한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아프지 말자가 맘 더 편한 그 어떤 것이었다. 물론, 아프고 안 아프고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코로나 확진되어 격리되고서 요 며칠 집안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내가 좀 아파도 될 거 같다. 다행히, 아이들이 이제는 스스로 밥 먹고, 옷 입고, 씻을 수 있는 일상적인 자립 생활은 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신랑 혼자만 고생인 게 아니라, 아이들도 알아서 아빠를 돕고 있다. 한번 코로나에 확진돼서 그 아픔을 아는 아들은 재감염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조심스레 내 방문을 두드려 나에게 밥도 내어주고, 대청소를 하자는 아빠의 말에 딸은 기꺼이 두 팔 걷어 자신의 방을 치우고 처리하기 애매한 쓰레기에 대해선 방문을 두드려 나의 도움을 받아 처리할 수도 있다. 물론, 신랑은 말 안 해도, 메뉴를 걱정하며 아이들 도움을 받아 저녁밥을 차리고, 먹은 후 설거지뿐만 아니라 정리까지 끝낼 수 있다. 평소 내가 하던 잔소리도 아이들에게 해가면서 아이들과 함께 돕고 도우며 집안이 나름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 얼른 내가 쾌차하길 바라는 맘이 더 크겠지만...


이렇게 자연스레 가사를 다 넘겨버리고 싶은 맘이 더 크지만, 그것은 사실 무리(하하..무리가 아니면 좋겠습니다.)일 거 같고, 가끔은 집안 걱정 안 하고 맘 편하게, 아프면 아픈 대로 맘 놓고 아파해도 되겠다. 엄마라는 타이틀 아래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여 아플 틈새까지 주지 않고 견디는 일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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