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종일 버벅거리며 다니느라 엄청 피곤한데도이상하게 잠이 안 왔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계속 뒹굴거리다가 일찍조식을 먹고 일정을 시작하기로했다.
오늘 저녁 7시20분 비행기로 브리즈번에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어서 꼭 가고 싶었던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오픈런을 기대하며 짐을 맡기고 호기롭게 호텔을 나섰다.
어제 유심 사건을 되새기며(사실 우리가 사기를 당한 게 아니라 원래 그 가격일 수도 있지만) 다시는 호갱이 되지 않겠다며 비싼 택시 대신 안전한 그랩을 부르기로 했다.
그랩은 베트남 여행할 때 이용해 봤던 터라 별 걱정 없이불렀고 기사님이 오셨다. 싱가포르에서 1박만 할 거라 환전을 따로 안 해서 카드 결제가 가능한지 물었더니 현금만 된단다. 베트남에선 카드등록 없이 그때그때 현금으로 계산을 했었기 때문에 카드등록을 할 생각도 못하고 우리나라처럼 당연히 따로 카드결제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안된단다.
일단 앱에서 카드등록을 하려고 하는데 몇 번을 다시 해도 등록이 안된다. 기사님은 기다리시고 등록은 안되고, 등줄기에 땀이 쭉 흐른다. 이 카드 저 카드 계속하다 보니 어찌어찌 등록은 됐는데,결제가 안 된다. 카드 등록 전에 호출을 한 거에 대해서는 결제가 안되나 보다. 계속해서 결제 실패... 호출 취소도 안되고, 기사님이랑 의사소통은 잘 안되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미칠 노릇이다. 호텔 프런트에 가서 물어보니 택시가 아니라 호텔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단다.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인가?
그러다 옆에 현금인출기가 있으니 가보라 한다. 얼른 뛰어가서 기사님께 현금을 뽑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 하고 현금인출기로 가보니 카드 투입구가 없다. 이건 대체 또 무슨 경우인지. 자세히 보니 외화 지폐를 넣고 싱가포르 달러로 환전해서 인출되는 시스템인가 보다. 다행히 한국돈 표시도 있길래 5만 원을 넣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며 뒤를 돌아봤더니 기다리고 있던 그랩 기사님이 사라졌다. 뛰어가서 둘러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시간이 돈인 그랩기사님이 아무리 봐도 안될 것 같으니 포기하고 가셨나 보다.
그랩 어플을 보니 기사님이 취소를 하셨다.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취소를 해주시지... 기사님께 너무너무 죄송했다. 소심한 우리는 이대로 그냥 가도 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호텔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니 기사님이 너희를 잡으러 다시 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가도 될 거라 얘기했다. 그럼에도 우린 불안했다. 이러다 먹튀녀로 기사님이 신고하면 출국이 안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앞으로 싱가포르 입국이 안 되면어쩌지?
불안했지만 계속 기다릴 수도 없으니 호텔 앞에 있는 택시기사님께 카드 결제가 되는지 두번이나 물어보고 결국택시를 탔다. 타고 가는 동안에도 계속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번 여행 대체 왜 이러는 거니... 얼마 안 가서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 도착했는데 세상에! 그랩 보다 택시비가 더 싼 거다. 분명 그랩보다 택시비가 더 비싸다고 했는데...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건지 나빠야 하는 건지. 그래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웃음이 났다. 이제부터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일거란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이 솟아났다.
그랩 때문에 오픈런은 못했지만 그래도 이른 시간이라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꽃을 좋아하는 우리는 식물원 이곳저곳을 그저 감탄하며 돌아다녔다. 우리나라 식물원이랑 다른 점은 식물원 안에 에어컨이 있는 건지 온실 특유의 후텁지근함 없이 상쾌하고 심지어 선선하기까지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플라워돔 보다 클라우드 포레스트가 훨씬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웅장한 폭포도 멋지고 인위적인 모양으로 꾸며놓지 않은 꽃과 나무들이 자연스럽고 좋았다. 어디에서나 보이는 거대한 슈퍼트리도 감동적이었는데 밤에 보면 얼마나 더 멋졌을까 생각하니 많이 아쉬웠다.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파서 슈퍼트리 옆에 있는 쉑쉑버거에서 햄버거를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허겁지겁 먹었다. 다 먹고 나니 굵은 빗방울의 소나기가 내렸다. 스콜인가 보다. 가족들과 함께 온 아기들이 빗속을 뛰어다닌다. 부모님들도 굳이 말리지 않는 눈치다. 꺄르륵 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고있자니 저절로 힐링이 된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에너지를 충전하고, 나가는 길을 헤매다 택시를 타고 머라이언 파크로 갔다. 내릴 때 트래블로그로 결제를 하려니 비자니 마스터니 얘기를 하시더니 계속 안된다고 하시다가 결국 결제가 됐는데 미터기에 찍힌 금액보다 많이 결제가 됐다. 기사님은 세상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계속 쏘리 쏘리 하신다. 카드 수수료를 이렇게 많이 내는 건가? 그럼 아까 그 택시기사님은 왜 미터기 금액만 받은 것인가?설마 또 호갱이 된 건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금액이 얼마 안 되기도 하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기사님의 쏘리 쏘리라는 말이 계속 생각이 나서 또 웃음이 나왔다. 미안은 하지만 내가 너희들 등을 좀 칠게 이런 건가? 택시기사님 때문에 오히려 텐션이 올라간 기분이다.
머라이언 파크에는 우리가 싱가포르 하면 떠올리는 모든 것들이 있다. 몸은 물고기, 얼굴은 사자인 머라이언상, 대관람차인 싱가포르 플라이어,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등 싱가포르의 랜드마크가 여기 다 있다.
다들 머라이언상 앞에서 입을 벌리고 인증샷을 찍기 바쁘다. 나도? 난 안 찍을 거야 했다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각도를 맞추고 입을 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부끄러움은 한국에 두고 온 것인가?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이게 뭐라고...
아무튼 수십 장 중에 하나는 건진 것 같다. 그럼 됐다. 바로 앞에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딱히 할 일이 없어 스타벅스에 가서 드래곤후르츠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여유도 부려본다. 시간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할 일이 없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는데 죄다 현금만 된단다. 또 시작인 건가?... 새로 들어오는 택시마다 물어보다가 다행히 카드 결제 가능하다는 친절한 기사님을 만나서 유쾌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호텔에 도착했는데 이분은 미터기 요금만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 짐만 찾아서 공항으로 갈 건데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니 노 프라블럼! 이라며 좋아하셨다. 공항 도착할 때까지도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고, 너무 고마운 마음에 급하게 가방을 뒤적이다 한국돈을 기념으로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다.
짐을 부치고 기사님이 꼭 가보라던 그 유명하다는 주얼창이 폭포 구경을 하고 쇼핑을 했다. 콴타스는 지연 출발이 일상이라고 해서 당연히 지연될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 완전 정시에 비행기를 타고 브리즈번으로 향했다. 무려 8시간의 비행이었지만 의자가 아시아나 보다 편해서 죽을만큼 힘들지는 않았고, 기내식때 주는 와인도 좋았다.
싱가포르 여행은 호갱으로 시작하였으나 끝은 유쾌한 택시기사님 덕분에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