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법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있지 않다. 오로지 우리. 우리가 묶은 매듭이기에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각자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 파티에서 눈을 돌리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때,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그런 세계.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거기에 존재하는 비밀스런 세계를 만나게 되는 거죠."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만큼 너도 나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은 꽤나 많은 갈등을 빚어낸다. 프란시스는 자신이 남자친구의 동거 제안을 거절한 만큼 소피도 그래주기를 바랐고, 꿈같은 공연이 있는 날 애인과 일찍 자리를 뜨려는 모습에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일류 무용가와 작가를 함께 꿈꾸던 시간은 어느새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사랑하지는 않지만 적령기라 말하는 시기에 만나고 있는 남자이기에 그와의 결혼을 통해 적당한 생활을 원하는 눈빛에선 서글픔을 느꼈다. 더 이상 그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마침내 믿어질 때, 감정은 결국 폭발을 하고야 만다. 소피와 다투고 만 프란시스처럼.
집착 없는 관계가 어디 있으랴. 현대인이 늘 말하는 ‘쿨함’이 과연 관계에서도 ‘멋짐’이 될 수 있을까. 이성의 연인이든, 동성의 친구이든 누군가 내 안의 영역에 들어온다면 으레 그 사람과 좀 더 진득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고 일상을 함께 하고 싶어진다. 나의 어떤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는 그런 행동을 내리게 된 내 생각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집착은 그런 사소함에서 시작되고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관계는 헐거워진다. 영화는 프란시스와 소피가 지척이라도 서로 미소만 보낼 정도로 적정한 거리만 유지하며 관계를 이어나가는 엔딩을 그렸다. 제목이 <프란시스>일 뿐 <프란시스와 소피>가 아닌 것은 감독의 의도적 장치였을까. 내 인생 전부를 걸고서라도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고 기꺼이 그럴 용기가 있는 두 여자의 우정을 극적으로 그린 영화 <델마와 루이스>와는 확연히 다르게 말이다.
누구나 이룰 순 없기에 꿈은 존재한다. 꿈꾸는 자가 부러움을 받는 건 기대되는 성공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애정과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다.
"제 직업이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거든요."
내 사람과의 관계 지속이 어려운 만큼 내 속에 단단한 자아를 만들고 꿈을 키워나가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관객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옛 시절을 흑백 영상을 통해 떠올린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프란시스의 앞날 때문인지 명료하게 보이지는 않는 캄캄한 화면에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부러운 건 사무직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충만한 자기애와 춤을 추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어서다. 그래서 감독은 늦어짐에 대한 주변 시선이 두려워 회피하지는 않았는지 관객으로 하여금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프란시스 핸들리’가 ‘프란시스 하’가 됐더라도 삶은 지속되고 찬란하다. 꿈꾸던 특별함을 완전하게 갖지는 못했지만 무대와 함께 하고 어디서든 역동적으로 춤을 출 수 있는 남들과는 다른 보통을 갖게 됐다. 결과의 불안감에 휩싸여 시도조차 접으려는 이들에게 감독은 묻는다.
“‘프란시스 하’도 아름답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