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일찍 태어난 구구
사장님에게 던진 나의 첫 질문은 단답형이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요.” 나는 소프트렌즈로 건조한 눈을 비비며 출근을 했다. 라이브바 우산.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다. 사장님은 손님을 가리며 방귀를 가열차게 뀌곤 했다. 그가 말했다. “삶은 고예요. 원래 괴로운 것이 인생이고 행복이라는 순간이 찰나같이 스쳐가는 거예요. 대부분 착각을 해요. 행복은 정상이고, 고통은 비정상이라고요.” 손님은 밤 10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나는 바를 두고 마주 앉아 그를 보았다. 말끔하게 정돈된 머리는 뒤로 묶여있었다. 해진 청남방을 걸친 그는 영락없는 인도의 구루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사장님의 말에 한참이나 눈을 껌벅 거렸다. 기가 찼기 때문이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사장님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겼다.
알바를 안 할 때는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내내 개키지 않은 이불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배가 고프면 일어나 바나나와 우유를 믹서기에 갈아 마셨고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루니씨, 드라이브 할래요?> 사장님 문자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거울을 보았다. 머리도 감아야 했고, 세수도, 양치도 해야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좋아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가 올 동안 세수를 했고 양치도 했고 치장도 했다. 머리에는 모자를 눌러썼다. 초록색깔 니트 모자를 골랐다. 사장님이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기에, 나는 황급히 내려갔다. 예상하지 못한 차가 서 있었다. 주황색깔 모닝이었다. 나는 웃으며 주황색깔 모닝 조수석에 탔다. 그는 한적한 곳에 잠시 차를 주차시켜 놓고 내게 물었다. “눈 보러 갈래요?” 나는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며칠 전에 뉴스에서 서해안에 눈이 많이 왔다고 했으니, 군산쯤 가면 눈이 있을 거예요.” 노래도 틀지 않은, 대화도 하지 않는 주황색깔 모닝 안에서 멀뚱멀뚱 창밖만 바라보는 나였다. “차가 따뜻하네요.” 내가 말했다. 이 말에 사장님은 신이 난 듯 주황색 모닝 자랑을 시작했다. 군산에는 눈이 있긴 있었다. 어떤 연탄구이집 앞 전봇대 아래에 눈이 얼어 있었다. 그는 신이 난 듯 눈을 밟아댔다. 나는 아주 잠깐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루니씨, 섬진강에 가보지 않을래요?>
주말에 사장님과 나는 산책을 하거나 등산을 했다. 또 드라이브를 가는 것이 루틴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섬진강 모래밭에 도착했다. 섬진강에 발을 담그는 사장님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물과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한참 모래밭을 걷다가 둑으로 올라가야 하는 길목에 작은 개울이 있었다. 신발을 벗기 싫어 망설이는 모습이 역력했는지는 그는 나에게 업히라는 시늉을 했다. 사장님의 등에 업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네 발자국 다섯 발자국. 등에서 내리면서 나는 기분이 묘했다. 처음으로 사장님이 남자로 느껴졌다. 구루도 남자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월아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루니씨는 글을 쓰니까 작사를 해보는 게 어때요?”라고 사장님이 물었다. “재밌을 것 같아요.”라고 맞장구를 치니 사장님은 키워드를 던져주셨다. “무뎌지다로 작사를 해봐요.” 그 말에 신이 나서 “네”하고 소리쳤다. 루틴처럼 쌓아온 시간과 걸음 속에서 신뢰도 쌓였다. 알바를 할 때는 병맥주를 행주로 닦아서 냉장고에 넣거나 설거지를 하고 육포를 구웠다. 통기타 음악을 좋아하던 내게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그 시간은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사장님은 같이 일하는 알바 오빠와 밴드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우리는 또 신난다며 팀명을 고민하고 의논하여 밴드환절기를 만들었다. 오빠는 베이스를 배우는 중이었고 나는 할 줄 아는 악기가 없었기에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무뎌지다는 키워드로 된 <나무가 말했지>라는 곡을 만들었다. 악보에 작사 구륜휘, 작곡 구채민이 적혀있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다.
나무가 말했지의 가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나무가 말했지 - 밴드환절기
나무는 왜 나무이고 나는 왜 나였는지
뚜렷하지 않아서 물음들이 춤을 췄었지
이젠 알아 서쪽으로 해가 진다는 걸
노을이 붉은 건 먼지 때문이란 걸
답이 있어 감각할 수 없어
우둔한 어리석음 무뚝뚝한 뭉툭함
무거운 과묵함 무디어가 비슷하게
모두 다
하얀 눈밭을 아무 말 없이 멀리서 다가오는 한 사람
달려가 보니 백년 묵은 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나무에게 물었어
너는 왜 사니
나무가 말했지
그냥
지금은 구루같던 사장님은 구구라는 애칭의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그건 태어난 시점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는 같은 시대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친구같은 동반자로 지내기로 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두 사람은 결이 비슷해요.” 그 결 오래도록 지속하고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경상남도 남쪽 바다를 매일 보며 지낸다. 삼천포라는 소도시에서 업사이클링 공방을 운영하며 하루를 버텨내는 중이다. 매일 같이 즐거울 수 없는 게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연한 산보 중에 만나는 고장난 가로등이 반가워서 함께 춤추는 용기 있는 우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