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서
그때 그 출근길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버스를 타고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내렸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모퉁이를 돌면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ㄹ필름의 사무실이었다. ㄹ필름은 열악한 환경의 외주 회사였다. 처음에는 여의도의 식당가 건물의 지하 한 칸에서 회의를 했고 이후엔 재개발 준비 중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조연출들은 매일 프리뷰를 했고 PD들은 가끔 사무실에 들렀다. 메인 작가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끔 회사에 들렀다.
그곳에서 나는 외국 방송사의 여행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국내외 거주 중인 외국인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제작됐으며 한국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일하게 된 경로는 조금 특이했는데 방송작가 출신으로 카페를 하던 사장님께서 소개해주셔서 일하게 됐다. 이력서가 아니었다면 이 프로그램을 했다는 사실도 잊었을 게 분명하다.
작가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노예 같다고 했는데 한때는 나도 꿀 빨았던 경험이 있다.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은 조금 바빴는데 혼자 그 많은 촬영지의 섭외도 하고 구성안도 썼다. 하지만 제작비 때문에 PD와 카메라 감독 단 둘이 떠나는 촬영이 시작되자 할 일이 없어졌다. 그저 스케줄과 진행상황 확인을 하며 사무실에서 자리만 지키면 됐다. 후반 작업도 내레이션, 자막을 메인 작가님이 쓰시고 방송 특성상 영어로 번역됐기 때문에 특별히 오타 체크 같은 것도 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출근은 해야 해서 오전 11시쯤 나와 점심을 먹고 오후 5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때로는 낮 1시쯤 도착해서 얼굴도장만 찍고 도망치듯 퇴근한 적도 있다.
나쁘지 않은 업무 환경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좋지 않았다. 이력서에 새로운 프로그램한 줄이 추가되었다는 것 빼고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이해했다. 고생한 만큼 분명 얻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