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출퇴근의 역사 - 반복되는 길 위의 인간

≪출퇴근의 역사≫ (이언 게이틀리, 박중서 옮김, 2016)

by 초마실

지은이 : 이언 게이틀리

옮긴이 : 박중서

제목 : 출퇴근의 역사

출판사 : 책세상

출간 연도 : (초판 1판) 2016.10.20.

페이지 : 총 441면

[사진출처:교보문고]

마흔 개의 문이 동시에 열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객차에서 쏟아져 나온다.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재촉한다.
물결처럼 흐르는 그 움직임은 마치 군대의 행진 같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다섯 개의 게이트를 지나면, 드디어 지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이언 게이틀리(Iain Gately)의 ≪출퇴근의 역사(Rush Hour: How 500 Million Commuters Survive the Daily Journey to Work)≫는 이 일상의 장면을 인류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저자는 홍콩에서 자라 영국에서 활동하는 저술가로, 사회사·문화사·일상생활사를 탐구해왔다.


일상의 고단함을 낯설게 보기

우리에게 ‘출퇴근’은 피곤하고,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출퇴근에도 역사가 있다’는 제목이 주는 낯섦이 흥미로워 책을 펼치게 되었다.
이 책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출퇴근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본다.
통근이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도시가 어떻게 팽창했는지,
그리고 인간이 왜 여전히 출근길에 오른 채 살아가는지를 문화사적 시각으로 풀어낸다.


철도의 등장 ― 엘리트의 통근에서 대중의 이동으로

이야기는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다.
1833년 화물 운송을 위해 건설된 철도는 1840년대에 이미 9,500km를 넘어서며
‘집에서 일터로 이동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어냈다.
정기권이 생겨났지만, 당시 가격은 노동자 연봉에 해당하는 50파운드.
처음의 통근자는 사업가나 전문직 등 엘리트 중심이었다.

철도의 확산은 시간 감각까지 바꾸었다.
각 지역마다 달랐던 시간이 ‘그리니치 표준시(GMT)’로 통일되며
‘시간 엄수’가 새로운 윤리로 자리 잡았다.
시계의 대중화는 권력자마저 시간의 규율 아래 두었고,
열차 안의 침묵은 신문과 책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일터와 집의 분리 ― 교외의 탄생

도시가 비대해지고 쓰레기와 악취가 넘쳐나던 19세기 후반,
영국 정부는 노동자 전용 열차를 늘리고 교외 주택 건설을 장려했다.
‘일터와 쉼터의 분리’가 산업사회의 기본 구조로 자리 잡는다.
통근이 일반화되자 기차역 주변에는 주거지가 형성되고,
지주와 건설업자들은 교외 개발로 새로운 부를 창출했다.
오늘날 서울과 수도권 위성도시의 관계도 이 과정과 닮았다.


자동차 시대 ― 미국이 만든 새로운 통근의 꿈

1891년 프랑스의 ‘말 없는 수레’로부터 시작된 자동차는
1908년 포드의 T모델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다.
자동차는 자유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교외 문화를 확산시켰다.
철도망을 따라 형성된 도시가 이제 도로망을 따라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 다수가 이런 교외에서 성장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통근이 말하는 인간의 본성

게이틀리는 통근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관계의 표현이라고 본다.
원하는 곳에 살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자유가 통근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하철의 과밀, 도로의 정체 같은 부작용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타인들을
‘침투한 낯선 사람’이 아니라 ‘무생물처럼 존재하는 동행자’로 인식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위급한 순간에는 다시 ‘공동체’로 변한다.
이 묘한 거리감은 매일의 출근길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감정일 것이다.


통근은 사라질까?

저자는 기술의 발전이 ‘일이 사람을 찾아오는 시대’를 열지 않을까 묻는다.
하지만 원격 근무가 확산되더라도,
인간의 접촉 욕구와 이동 본능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결국 통근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동차를 몰고 도시를 오가는 그 행위가
사냥과 탐색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일종의 현대적 의식이라는 것이다.


내 통근길에 대하여

나 역시 오랫동안 자동차로 출퇴근하고 있다.
아침엔 라디오로 세상을 듣고,
퇴근길엔 적당한 음악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책은 400쪽이 넘지만, 통근의 인문학적 깊이는 다소 아쉬웠다.
그럼에도 문을 여는 순간의 바람,
엑셀을 밟으며 느끼는 속도의 감각 속에서
‘나는 왜 매일 이 길을 가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긴다.
아마 먼 미래의 누군가도,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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